한국사 바로알기-11

해태는 예부터 전해오는 상상의 동물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영물이다. 해치(獬廌)라고도 한다. 중국 순임금 때 법을 담당했던 고요(皐陶)라는 신하는 옥사를 다스릴 때 해태로 하여금 죄 있는 사람을 뿔로 들이받게 했다 한다.

해태는 그래서 법과 정의를 다스리는 동물로 여겨져 지금의 검찰과 같은 사헌부의 상징으로 삼았다. 사헌부 수장의 관복 흉배에는 해태가 그려져 있으며 다른 문반 관리들의 흉배는 공작, 기러기, 학과 같은 동물과는 딴판이다.

또 사헌부 관리들은 해치의 ‘치’를 따서 ‘치관’이라는 해태문양이 장식된 모자를 썼다. 치관을 쓰는 이유는 해태가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이기 때문이라고《인조실록》은 밝히고 있다. 또 고종7년(1870년)2월 12일자에 “해태 이내에서는 백관이 말을 타지 못하도록 함께 엄히 신칙하라”는 고종의 하교가 실려 있다. 즉 하마(下馬) 구간의 경계표시이기도 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서 있는 해태는 관악산의 화기로 인한 경복궁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해태는 원래 광화문 앞에 있지 않았다. 광화문에서 50미터쯤 떨어진 육조거리의 사헌부 앞에 세워져 있었다.

임금이 경복궁 근정전에 앉아 남면(南面)할 때를 기준으로 왼쪽 즉 동편에는 이조, 호조, 의정부, 한성부가 있었고, 오른쪽 즉 서편에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중추부, 사헌부가 자리 잡았다. 그 중 사헌부 앞 양쪽에 해태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해태는 사헌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헌부 앞에 있던 해태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 공사로 철거되었다가 총독부 건물이 완공되자 그 앞에 세워져 식민지 지배의 총본산인 조선총독부를 지켜주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불탄 광화문을 1968년 복원될 때에 현재의 자리에 앉혀졌다.

오늘날 해태는 광화문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과 서초동 대검찰청 앞, 즉 입법부와 사법부 앞에도 해태가 있다. 뿐만 아니라 시도를 잇는 경계선에도 대부분 해태상이 세워져 있다.

1975년 국회의사당 앞의 해태는 당시 고증자문위원이었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화재를 예방하려면 조선시대처럼 해태를 세워 화기를 눌러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에 따라 세워졌다고 하는데, 관악산 화기론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태상 건립의 본연의 의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공직자의 바른 태도와 곧은 마음을 촉구하는 상징으로서의 해태는 영영 사라진 것일까?

지금처럼 나라의 정국이 어수선 한 이 때 사헌부를 상징하는 올곧은 해태가 필요한 시기이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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