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선인의 풍속-22

임금에게는 세가지 호칭이 있다. 첫 번째 호칭은 어렸을 때의 이름 초휘(初諱)를 비롯하여 호(號) 혹은 자(子)이다. 태조 이성계의 경우는 초휘가 성계(成桂)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며 자는 중결(仲潔)이었다.

두 번째 의 호칭이 살아서 경사스러울 때나 죽어서 올려 지는 시호(諡號)이다. 그러므로 왕이나 왕비에게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문자로 된 시호가 올려 지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하나만 통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생전의 업적이 찬란했던 세종대왕에게 명나라 황제가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지어서 보냈으므로 그의 실록을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이라고 부른다.

세 번째의 호칭은 태조(太祖), 세종(世宗), 단종(端宗), 세조(世祖), 성종(成宗)과 같은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문자 그대로 종묘에 봉안하게 될 위패에 새기기 위한 호칭이므로 죽은 다음에 올려 진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임금에게는 ‘전하’ ‘주상전하‘ ’상감마마‘ 등으로 불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보위를 지켰던 임금의 묘호에는 사후에 태조, 세조, 선조와 같이 조(組)로 된 묘호가 있고, 세종, 성종, 철종, 고종과 같이 종(宗)으로 된 묘호가 있으며, 폭정과 난정으로 인해 보위에서 쫒겨난 임금은 묘호와 달리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과 같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부른다.

왕조 초기에 태조, 세조와 같은 ‘조’의 임금은 모두 정변으로 왕권을 장악했던 임금이었으므로 ‘조’의 개념에 투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종’의 임금은 순리적인 왕위 승계를 받은 임금에게 올리는 묘호로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직후인 태조 원년(1392) 11월6일에 이성계의 4대 선조 존호(尊號)를 책봉해 올렸다. 그러자니 ‘묘호’를 정하는 규정이 있어야 했다. 이 날의 『태조강헌대왕실록』에 적힌 내용은 이러하다. 황조실(皇祖室)의 책호문은 이러하였다.

“공(功)이 있는 이는 조(組)로 하고 덕(德)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하니, 효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시호로써 이름을 바꾸게 하니 예의는 마땅히 왕으로 추존함을 먼저 해야 될 것입니다.” 이로부터 모든 임금의 ‘묘호’는 이것을 규범으로 짓게 되었다.

‘조’와 ‘종’의 임금을 계급적이거나, 적서(嫡庶)의 개념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조실록』에 등재된 규범에 따라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공(功)과 덕(德)의 개념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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