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낙인
전 창원교육장
전 경상남도교육위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지원과 진상 규명을 위해 설립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와 그 대표를 지낸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당선인을 둘러싼 의혹과 파장이 연일 증폭되고 있다. 윤미향의 본인, 아버지급료, 아들유학, 아파트구입, 단체, 국가보조금 횡령...오늘도 계속 새로운 사실이 들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가 커질수록 또렷하게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조국 사태’의 장본인인 조국(曺國) 전 법무부 장관이다.

이번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하던 지난 12일 윤미향 당선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6개월간 가족과 지인들의 숨소리까지 탈탈 털린 ‘조국’이 생각나는 아침”이라며 자신을 둘러싼 의혹 공방에 조국 전 장관을 소환했다. 아직 아무도 조국 사태와의 유사성을 언급하기 이전에 윤 당선인이 스스로 ‘여자 조국’임을 드러낸 것은 이후 전개될 이번 사태의 본질과 그 파장이 조국 사태와 너무나도 똑같이 닮아있음을 자인한 것이 아닐까?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피해자 할머니 당사자를 배신자로 찍어내는, 피해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정대협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 그리고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를 위한 신성한 권력‘의 단체로 전락한 것은 어디서부터인가?

위안부 할머니는 “내가 살아남은 게 꿈같아.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했던 할머니들의 한숨을 기억한다. “성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른다.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이용당했다”고 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앞세워 이름도 거창한 정대협, 정의연을 내걸고 탐욕을 채운 이들로,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날아오른 노랑나비들의 순수한 날개짓이 어찌하여 이리도 변절되었을까?

한일 간에 야기되고 있는 여러 현안문제 중에서,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중 해결사를 자처한 국내 책임자들의 비리 문제가 더 크게 언론에 부각됨으로써 정작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국내의 이러한 시점에서 현재 양국 간에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안과제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 어떤 대응전략을 펼쳐나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발전지향적인 자세인가를 찾아서 경직된 한일 관계를 경쟁적 공존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적대적 공존관계까지라도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파헤쳐 본다.

첫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확한 실상은 어떠한가 ?

일본 제국주의의 군대가 군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1931년 만주 침략 때, 적은 수의 현지 위안소를 운영한 것이 그 시초였다. 1937년 남경(南京) 대학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이 주둔한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중에는 일본,조선,대만,중국,남양군도,동남아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군부대가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거나 민간인에 위탁하여 운영하였다.

그런데 현재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쟁점은 피해국인 우리로서는 철저하게 대가 없는 강제징발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모집, 수송, 관리 등 위안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지원업무에는 기여하였지만, 일본 총독부나 군에서 직접 주도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억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궤변적 주장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국가가 직접 사과나 배상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망언들이다. 물론 당시 그런 제도에 편승하여 일본인이나 우리 내국인들 중에서 사업자나 주선인들이 그런 위안소 운영에 관여한 사실이 없지 않았고, 위안소 종사자들에겐 일정 수익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위안소의 설치운영은 전적으로 일본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동원된 위안부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선의 현지인들이 많았고, 심지어 일본인, 네덜란드인까지 동원되었음이 밝혀졌다. 동원방법은 주로 생계가 곤란한 집안의 소녀나 그 부모를 대상으로 취업사기, 인신매매, 협박유괴 등으로 동원하였는데, 전쟁말기에는 지역별 할당제로 강제 동원 사례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 명의로 동원된 전인원은 1931-1945년 간 최대 10만 여명으로 추정되는데, 연구자에 따라서는 최저 2만에서 최고 20만이란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중 노동현장에 투입된 근로정신대와는 별도로 군 위안부로 동원된 연인원은 3,600-7,200명 선이란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15,000- 18,000명쯤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위안부 문제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지만 국격이나 개인의 존엄성 문제로 수면 하에 숨어들었다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고백으로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와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2017년까지 공식적으로 당국에 신고 된 숫자는 남한이 238명(북한:218명)이었는데 2020년 5월 현재 생존자는 겨우 18명뿐이다.

그런데 종전 후 귀국치 못한 분들도 많았지만, 다행히 귀국한 분들도 그 위안소 생활이 마치 천부(天賦)의 멍에인양 고통 속에서 살아온 눈물겨운 생활이었다.

몰락한 조국 때문에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긴 채 쓰라린 생활을 이어온 비운의 일생이었다. 보상은 커녕 홀대와 멸시로 점철된 생활이었다. 그런 그늘진 생활을 이어오면서도 가슴에 맺혀있는 응어리진 바람은 오직 하나뿐. 그것은 자기 인생 전체를 앗아간 가해자 일본 당국자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둘째, 위안부 문제의 발전적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현재 한일 간 위안부 문제는 2015.12.28일 박근혜 대통령 시절 미흡하고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한일 간 ‘2015 합의’가 체결되어 10억 엔이 전달되고 ‘치유화해자단’까지 설립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4개월 후인 2017.12.27일에 ‘2015 합의’는 굴욕외교의 굴욕합의라 규정하며, 전임 정부가 체결한 합의 문서를 사실상 일방적으로 파기시켜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한일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2018년 들어 드디어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를 White List에서 제외 조치하였고, 이어 한국에서는 GSOMIA의 파기 선언에 이르렀다. 현재 이러한 모양새는 목전의 명분일 뿐, 아무런 실익 없는 감정놀음의 외교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캄캄한 과거지향의 외교일 뿐이다.

우린 여기에서 꼭 유념해야할 부분은 국가 간 외교는 자기 입장이나 주장만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입장도 간파하면서 상생의 선린우호 외교활동을 펼쳐나가는 일이다. 역사엔 영원한 우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다지 않은가?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 당국이 주도한 증거들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데, 왜 일본 정부에서는 그토록 애써 아니라 우기며 망발을 쏟아내고 있음인가? 그것은 양국 간 역학 관계에서 빚어진 의도된 발언들이다. 우린 “국제관계란 철저히 Power Game이다.”라는 냉혹한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평화와 안전, 인권과 존엄을 추구한다는 UN에서도 상임이사국이란 Power 조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이 증명한다. 그것은 Power의 공식적인 인정이다.

그러기에 패전국이었던 일본이 계속하여 UN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하여, 총력을 경주하는 그들의 야심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의 국력이 일본보다 우위한 입장이라면 사과를 요구하지 않아도, 먼저 와서 엎드린 자세로 배상금을 내놓으며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을 그들이다. 그러기에 사과나 배상 요구에 앞서, 우리들이 앞서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힘을 기르는 일이다. 그 키워낸 국력은 바로 극일(克日)의 길이고, 승일(勝日)의 길일 것이다. 그럼 현 시점에서 위안부 문제의 매듭을 풀어낼 현실적 해결방안은 무엇일가?[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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