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하영갑
시인, 수필가, 이학박사
시림문학회 회장

보슬비 내리는 오늘 오래된 우산 받쳐 들고 숲길을 걷는다. 모래사장에서 지남철로 겨우 되찾은 몰골. 덕지덕지 붙은 철가루 속의 꾀죄죄한 모습. 파란만장했던 설익은 삶을 통해 얻은 본() . 동족의 수많은 얼굴들로부터 홀대 받은 불순물들 아리고 시리지만 몰상식할 정도로 깨끗이 도려내고 떼어 낸다. 지금까지 살아 온 길에 남은 것이라고는 온통 빚뿐이다. 그것도 한 짐이 넘는다.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게 보이는 하늘. 보통 때와 다른 오솔길 주위의 새 소리가 가슴 한 가운데에 날아든다. 가끔 찾는 이 산에는 많은 바람들이 뿌리 되어 얽혀 있고 친구의 어린 자식도 혼 되어 뿌려져 있는 곳이다. 산자락에 장대하게 자라 숲을 이루고 있는 낙락장송에서부터 산 정상부근 키 작은 소나무까지 한 목소리로 부르짖는 소원은 하나같다.

 

한 그루 소나무의 일생이 인간의 한 살이와 무엇이 다르겠냐.

잘 살아 보라.

제대로 살다 가라.

그리하여 조잡하고 짧은 일생을 빛내 보라고”.

 

<솔씨>

날도 때도 모르는 날 바람결에 날아 앉아

바람의 입김 따라 새의 먹이 되고

흙먼지 감고 돌다 이슬에 발 내린 싹

가냘프기 그지없네

 

꿩 비둘기 눈 피하고 토끼 노루 멧돼지 등살 피해

잡초 속에 내린 뿌리

산비탈에 스민 습기 한 방울도 놓칠세라

뿌리골무 열어 놓고

햇빛 줄기 놓칠세라 햇살 잡고 뜀뛴 몸

한발에 몸 다지고 폭풍우에 가지 솎아 키 키우고 몸 불렸네

 

천둥번개 엄동설한 온 몸으로 막아 내어

숲의 일원 되었으나

욕심쟁이 나무꾼 눈 피할 수 없어

송진 올린 가지마다 불꽃 되어 오르고

송진 긁어 풀 만들어 조각조각 꽃 피우고

올곧은 몸 큰 집 되어 만대유전 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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