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인 15세기의 지배 계층.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 중에서 고려 왕조 테두리 밖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급진파로, 정도전 등이 시조이다. 훈구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개창에 주도적 역할. 둘째, 중앙 집권을 추구하여 왕권 강화를 이룩. 셋째, 문학으로는 사장을 중시. 넷째, 사상적으로는 성리학 이외의 불교, 도교, 풍수 사상 등 타 사상을 수용. 다섯째, 단군 조선을 강조하는 민족적, 자주적 역사관을 지녔고. 여섯째, 과학 기술을 중요시하여 세종 때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 사학파로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한 신진 세력. 길재의 학풍을 이은 김종직, 김굉필 등으로 관학파(훈구파)와 대립하여 그 결과 사화가 일어났다.

조선 시대 김종직이 수양 대군(세조)의 계유정난(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며 지은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초나라 황제인 의제가 신하인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이는 단종이 수양 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결국 세조를 비난한 글이다. <성종 실록>을 편찬하던 중 사관인 김일손(김종직의 제자)이 사초에 넣었다. 이 글을 훈구파가 발견하여 사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연산군에게 알림으로써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史草)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훈구 세력이 연산군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영남 사림은 대부분 몰락하였다.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친어머니였던 폐비 윤씨와 관련하여 그녀의 폐비에 찬성했던 신하들과 연산군에 동조하지 않았던 세력이 함께 연루되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사림과 훈구 세력의 대립으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선비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부른다.

세 번째 사화인 기묘사화는 사림의 지나친 압박에 싫증을 느낀 중종과 사림을 몰아낼 방법을 찾던 훈구 세력이 협력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의 대표적인 사림 세력인 조광조 일파에게 역적이라는 누명을 씌워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네 번째 사화인 을사사화는 명종 시기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尹任)과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권력 다툼으로 많은 선비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선비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선비가 희생되어 사화로 분류된다.

[타임머신]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