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고령장 풍습은 '효'를 중요시 여겼던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풍습이라고 했다.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나온 역사책, 지리서, 수많은 문집들 어디에도 노인을 산채로 버리는 고려장 이야기는 단 한군데도 찾아볼 수가 없다.

고려장 풍습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에서 1924년 발간한 조선동화집 에 <어머니를 버린남자てる男>에 실려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는 지금으로 치면 교육부 산하 교과서편찬위원회나 국사편찬위원회 같은 곳으로, 당시 편집과정은 오다 쇼고( )로서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였다. 때문에 조선동화집 의 편찬동기와 의도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결부 시키지 않을 수 없다.

조선총독부 간행 조선동화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다른 동화집에 그대로 혹은 변형된 채 재수록되었다. 즉 총독부의 조선동화집 의 내용이 확대재생산 된 것이다. '조선동화집'은 조선의 수수께끼 에 이어 조선민족자료 제2편으로 분류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손진태(호 남창. 1900년~미상.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 1932년 조선민속학회 창설. 1933년 조선민족을 창간.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재직 중 6.25전쟁 납북)의 조선민담집 에는 고려장 이야기를 싣되 제목을 '기로전설' 이라고 하고 있다.

이보다 약 40년전인 1882년에 간행된 일본통 미국인 그리피스의 저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 실려 잇는 고려장에 대한 짧막한 글에도 노인을 산채로 묻어버리는<고리장>이라는 인신제사人身祭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지만 이는 시종일관 일본의 입장에 한국의 풍경이었다. 또 일본 측 자료에 의거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고려장과 인신제사'에 대한 그의 지식은 한국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얻은 지식이 분명하다.

고려장이 고려시대의 장례가 아니라면 고려의 실제 장례풍습은 어떠했을까? 고려시대에는 융성한 불교의 영향으로 주로 화장을 했다. 절에서 스님의 인도 아래 화장하여 유골을 절에 모셔두었다가 일정기간이 지난 후 석관이나 항아리, 돌판에 담아 땅에 묻거나 산이나 강물에 뿌리기도 했다. 왕실에서는 매장을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구덩이에 묻는것으로 대신했다. 출토된 고려시대 유물과 석관 등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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