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에게 노하여 함흥으로 가버린 태조 이성계. 그가 아들 태종이 보낸 사신들을 도착하는 족족 활로 쏴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데서, 한번 가면 깜깜소식인 사람이란 뜻의 함흥차사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함흥차사에 대해서는 얽힌 이야기듣 중 널리 알려진 것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끌고 가 이성계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강을 미처 건너지 못해 죽음을 당했다는 박순朴淳의 이야기, 그리고 이성계에게 거짓말을 하여 제 목숨은 건졌으나 대신에 후손의 눈이 멀었다는 성석린成石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박순이 함흥에 갔다가 목숨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이성계는 아직 함흥에 도착하기도 전이었으며, 성석린의 아들과 손자가 눈멀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함흥차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석린은 함흥차사로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함흥차사로 간 사람들 가운데 죽은 사람은 박순과 송유宋琉 둘뿐이었다. 둘 다 이성계가 아니라 조사의趙思義가 이끄는 반란군에 죽었다.

함흥차사의 전말을 알아보자. 1400,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친형인 방간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한 이방원. 그가 바로 태종이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개경 궁궐을 떠나 강원도 안변으로, 소요산으로, 양주 화암사로 떠돌기 시작했다.

태종은 아버지가 가는 곳마다 사람을 보내 문안을 여쭙고 근황을 살폈다. 때로는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아비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의 팽팽한 신경전이었다.

함흥차사로 죽은 사람은 박순과 송유, 두 사람이다. 그것도 이성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사의 반란군에게 피살당했다. 조사의의 반란이 이성계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이루어졌음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이들은 이성계가 직접 죽였다고는 할 수 없으며, 차사를 죽이는 것이 이성계의 뜻이 아니었음은 송유 다음의 차사들이 모두 무사했다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또한 성석린은 이성계가 안변과 소요산에 머물고 있을 때 차사로 갔을 뿐, 함흥에는 간 적이 없다.

그런데도 함흥차사에 대한 오해는 매우 뿌리 깊다. 성석린의 이야기는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축수편逐睡篇>에 나오고, ‘박순과 어미 말 이야기는 박순이 죽은 지 약 300년 뒤에 쓰인 민정중閔鼎重의 문집노봉집老峯集에 실려 있다. 민정중의 스승 우암 송시열도 함흥차사에 대한 오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보낸 편지에 자식이 떠난 뒤 소식이 없어 걱정이 심하니 이것이 이른바 함흥차사 아니겠는가?” 하고 쓰고 있다.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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