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 나들이-29

무과시험에서 말석으로 합격한 자와 세조의 대화에 이어서, 이보다 더 웃기는 무과시험이 중종 15(1520)에 있었다. 이 해에도 1천 명을 뽑았는데 한결같이 실력이 없는 무사들이 응시하였다. 그래서 말은 물론 소도 못타는 사람이 합격했다.

한 응시자는 소를 타고 활을 쏘는데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아 소를 잠깐 세우고 나서 쏘아 맞혔다. 시험관이 이것을 보고 고함을 쳤다.

 

시험관 : 자네는 왜 소를 멈추게 하는가.

응시자 : 소가 방금 오줌을 눈다기에 세웠습니다.

 

이처럼 무과시험이 쉬워지자 조금만 활을 쏠 줄 알면 모두 과거에 합격하게 되었고 10만양병설을 거론된 뒤부터는 한해에 평균 6백 명의 무과합격자를 냈다.

그러나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하나도 쓸만한 무사가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 사람은 과거를 가장 중히 여긴다는 말이 어색해졌다.

임진왜란 때 무과에 응시하는 양반자제가 없어 양인(良人)이 응시해도 합격하고 심지어 노비가 무과에 응시하여 장군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쓸만한 인재가 나지 않았다.

임란 때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손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비를 불렀더니 어디를 갔는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때 이항복이 하는 말이 이 놈이 필시 시험장에 나아가 무과시험을 치르고 있는 거로구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성균관도 그렇고 과거시험도 그렇고 모두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부정부패의 원인을 제도에 탓하지만 성균관이나 과거제도는 조선 5백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웬일인가. 법을 고치면 다 된다는 것이 법률가들의 짧은 소견이다.

역사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법이나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 아니 인간들을 바꿔 놓아야 하는 것이다.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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