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행-19

그런데 고려시대에 일반 농민을 뜻하던 백정이 어떻게 해서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도살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변한 것일까?

그것은 조선 초 세종 때의 양인확보 정책 때문이었다.

세종실록5(1423) 108일자 기사를 보면, 병조에서 세종에게 이런 건의를 하고 있다.

재인이나 화척을 백정이라 부르게 하고 땅을 나눠주어 일반 백성들과 어울리게끔 하자는 것이다. 세종은 병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인과 화척에게 백정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화척과 재인을 백정으로 승격시켜준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화척과 재인을 불쌍히 여겨 베푼 시혜가 아니라, 고려 말 이후로 혼란해진 신분질서를 바로잡아 새 나라 조선의 집권체제와 질서를 강화하는 한편, 양인 숫자를 늘림으로써 세금 수세원을 확보하여 국자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고도의 정책이었다.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나 조선에서도 천인은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은 양인들이었다. 따라서 나라의 입장에서는 수세원을 확보하려면 세금 부담자인 양인 수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다. 양인이 많을수록 거둘 수 있는 세금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재인과 화척들이 백정이란 칭호를 얻자 진짜 백정인 농민들은 불만스러워했다. 이들은 새로 백정이 된 자들을 신백정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들과 선을 그었다.

세종 24년의 실록기사를 보면, “관리와 백정들이 신백정이라고 부르면서 차별을 두며, 수령들이 이들을 사냥 등 여러 가지 일에 부리고, 유기를 공공연히 거두어가는 일까지 있다면서 세종이 실태 조사를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느덧 농민들은 백정이라는 칭호 자체를 기피하며 그들을 천시했다. 결국 일반 농민들은 백정이란 칭호 대신 평민, 양민, 촌민, 백성 등으로 불리게 되었고, 백정은 도살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격하되고 말았다.

일반 농민을 일컫던 백정은 그 자체가 모욕적인 호칭으로 변질된 것이다.

세조 때 일이다. 왕 앞에서 성리설을 논하던 지관地官 안효례, 최호원이 서로 자기 의견을 고집하다가, 화가 치민 최호원이 내뱉었다.

너는 백정의 손자다.” 그러자 안효례가 응수했다.

내가 백정의 손자라면, 넌 내 아들이다.”

백정의 자식이라는 게 욕 중의 욕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일화다. 안효례와 최호원은 왕 앞에서 무엄하게 입을 놀린 죄로 대사헌 양성지에게 탄핵당할 뻔했으나, 세조가 심심파적이었으니 탓할 것 없다하여 가까스로 죄를 면했다,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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