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도
경남환경교육연합
환경봉사위원장

보리밭 하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윤용하(尹龍河) 작곡의 ‘보리밭’을 연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어렵사리 자란 장년층에게 보리밭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남도(南都)에서 끼가 있는 계집아이를 빗댈 때 ‘노고지리 지지배’라고 한다.
옛날 시골에서 가장 선호되었던 밀회(密會)와 정사(情事)의 장소가 무르익은 보리밭이었다.
그 보리밭 정사로 보리밭에 사는 노고지리, 곧 종달새를 놀라게 하여 울리는 계집애가 노고지리 지지배인 것이다.
이 노고지리 지지배와 맥락되어 ‘보리밭 파수꾼’이라는 속담도 있다.
일은 싫어하여 빈둥빈둥 놀며 남의 약점이나 염탐해 이를 미끼로 해서 뜯어먹고 사는 질 나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하루 종일 보리밭 가에 앉아 종달새 날아다니는 것만 지켜본다 하여 보리밭 파수꾼이요, 그로써 정사 현장을 발견하여 소문낸다고 공갈하여 그를 미끼로 입막음 값을 뜯어먹고 사는 진드기 같은 인간인 것이다.
보릿고개는 초근목피의 가난 고개요, 보리알 신세 하면 소외당한 처지를 뜻한다.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보리범벅이라 하고, 싱겁고 재미없는 사람을 보리죽에 물 탄 것 같다 하며,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당하는 사람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라고 한다.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을 보리가시랭이라 하고, 몹시 후려 패는 것을 보리타작한다 하며, 꽁보리밥 · 보리떡 · 보리죽 하면 극빈의 상징이었다.
따지고 보면 보리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의 기후나 풍토에 가장 알맞은 곡식의 종류가 있어 그걸로 농사를 지으면 일손도 적게 들고 기후의 변덕이나 병충해에 강해 잘 자라게 돼 있다.
유럽 풍토에 알맞은 곡종이 밀이라면 보리는 한반도의 풍토에 알맞은 곡종이다.
보리농사보다 알맞지 않은 벼농사를 선택, 그토록 힘겹게 지어 온 것은 쌀이 보리에 비해 단위 면적당 영양 소출량이 품종에 따라 20~50배가 많기 때문이요, 좁은 땅에서 많은 사람이 먹고 살아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밥맛도 떨어지는데다가 먹고 나면 쉽게 배가 꺼지기 때문에 보리에 대한 이미지가 형편없다. 사대 사상에 찌든 우리 한국 사람들, 우리나라 것이면 무턱대고 열등시하고, 서양 것이면 무턱대고 선망하는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리가 고스란히 구현한 것 같아 뒷맛이 텁텁하다.
괄시받고 천대받으면서도 오뉴월 들판을 ‘보리누럼’으로 누렇게 물들여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보리밭인데, 그마저도 향수속의 풍광으로 증발하여 차를 고속으로 달려도 보리누럼 보기가 어려워졌다. 짓밟히고, 뭉개고, 구박받은, 그래서 사라져 온 우리 한국인의 주체성이요 향수 인자(鄕愁因子)인, 우리와 너무 친근한 슬픈 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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