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20

성균관의 위기는 밖에서보다 안에서 싹트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학생들의 부정행위였다.

그들은 소위 원점(圓点)을 부정하게 따면서 권당(捲堂)이라는 학생시위를 감행하였다.

요즘처럼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았으나 종로거리에 나아가 연좌데모를 서슴지 않았다.

성균관 학생들에게는 특채가 있었고 또 초시(初試)를 면제해 주는 특혜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초시란 요즘의 고등고시에 앞서 보는 예비고시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성균관에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렇다고 성균관 학생 전원에게 초시를 면제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점제도를 두게 되었다. 즉 원점제도란 300점을 취득해야 초시를 면제해 준다는 규정이다.

원점은 요즘의 학점과 비슷하나 성적과 관계없이 출석만 하면 점수를 따는 그런 제도였다.

가령 원점 300점을 따자면 반드시 성균관에서 자고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하고 그리고 출석부에 서명하여야 한다. 그러기를 3백 차례를 거듭하여야 하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원점제도는 학생들이 성균관 안에 유숙하면서 공부하라는 뜻에서 시행된 제도였다. 그것은 학생들이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도 조석으로 대성전에 예배를 올리면서 경견한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취지는 차츰 퇴색하여 학생들이 성균관에 유숙하지 않고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성균관에 나와 식사하고 다시 집에 갔다가 저녁에 성균관에 나와 식사하여 원점만 따는 얌체족속이 늘었 났다. 심지어는 하인을 시켜 밥 먹게 한 뒤 원점을 따는 자까지 나타나 이 제도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성균관에 공부하지 않는 엉터리 학생이 늘어나고 성실하게 공부하고 기숙하는 학생 수가 줄어들어 빈방이 늘어나자 성균관의 위상은 날로 추락해 갔다. 더욱이 성균관 학생들이 빈번하게 권당을 하게 되었는데 정치적 문제를 내걸고 모든 학생들이 성균관에서 철수하여 공부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동맹휴학이었는데 단순한 동맹휴학이 아니라 요즘의 학생데모처럼 구체적인 요구 조건을 내걸고 궁궐 앞에 진을 치고 시위하였다.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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