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행-20

재인과 화척을 백정으로 승격시켜 일반 농민과 섞여 살게 하려던 조선 초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재인과 화척들이 기왕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고 일반 농민들과 쉬이 동화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들을 기피한 탓도 있었다.

물에 기름처럼 겉돌던 백정들은 툭하면 도적으로 몰리곤 했다.

생활이 곤궁한 백정들이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조선 명종 때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대도 임꺽정은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다.

실록에는 임꺽정 말고도 도적질하다 체포되어 처벌받는 백정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백정은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오죽하면 일반 농민들과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이들에 대해 어떤 대책을 세우면 좋겠는가 하는 것이 과거시험 문제에까지 출제되었을까.

세조 14(1468) 42일 경회루 연못가에서 실시된 과거시험 문제, 즉 책문策問은 이러했다.

도적의 근원은 모두 빈궁한 데서 일어난다고 하나, 지금의 도적질을 하는 자는 모두 호한豪悍한 무리를 거느려, 그 사이에 재인과 백정은 108,9가 되니, 비록 평민과 섞이어 살더라도 오히려 교화가 따르지 못하였다.

수백 년 이래 스스로 한 풍속을 이루어 뿌리를 다 제거할 수가 없었으니, 제거하지 않으면 도적이 끊이지 않는데 장차 무슨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

결국 조정은 백정을 농민화 동화시키려던 저책을 포기하고, 정반대로 철저히 차별하여 통제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바꾼다.

백정들을 일정한 곳에 모여 살게 하면서 호적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고 출생과 사망, 도망을 정기적으로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게 했으며, 도망치다 붙잡힌 백정은 사형에 처했다.

다른 마을에 볼일 보러 가는 백정은 수령이 발급한 행장行狀, 즉 통행증을 소지해야 했다.

이들을 얼마나 잘 통제했는가가 해당 고을 수령의 인사고과에 반영될 정도였다.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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