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대접 받기 시작한 성균관
푸대접 받기 시작한 성균관
  • 경남연합신문
  • 승인 20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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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나들이 - 31

성균관 유생들이 안으로는 부정행위를 일삼고 밖으로는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공부하는 성균관의 위상은 절로 무너지고 말았고 세상 사람들이 성균관을 우습게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균관에 가기보다 차라리 서울의 사학(四學)에서 공부하거나 유명한 선생님에게 개인지도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에는 중학(中學), 동학(東學), 남학(南學),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의 사학이 있었는데, 성균관보다 훨씬 격이 떨어지는 학교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자리를 피하거나 외면하는 풍조까지 생겼다.

학생뿐만 아니라 성균관의 교수나 직원까지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성균관장은 지금의 서울대총장에 맞먹는 자리였지만 대사성(大司成)이 겸직하는 자리가 되어 한 달에 한 번 성균관에 가서 대성전에 절을 꾸벅하고 돌아가는 그런 자리였고, 그 밖의 교수와 관원들은 세상 사람들이 별 볼일 없는 벼슬아치로 백안시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그 모양이니 교수까지 천대를 받게 된 것이고 이것은 또 권당하는 성균관 학생들은 미워하게 된 임금님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합격하면 성적순으로 중앙관직에 배치되는데 성균관은 가장 성적이 나쁜 합격자가 가는 자리가 되었다.

홍문관(弘文館)이 제일 좋은 자리였고 다음이 승문원(承文院)이었다.

여기도 끼지 못하고 저기도 기지 못한 합격자가 별 볼일 없는 성균관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성균관은 초창기의 성균관이 아니었다. 성균관이 벼슬길에 오르는 요로였던 시대는 가고 그 세력이 떨어져 가장 한산한 자리 잡초가 우거진 관서가 되고 만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모든 제도가 문란해지자 영조가 성균관 정문 앞 하마비를 세워 말을 타고 다니던 유생들도 이곳부턴 걷게 했다. 고관대작의 자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마비(下馬碑) 옆에는 탕평비가 자리 잡았다. 어린 유생들에게까지 퍼진 당쟁의 폐해를 근절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건 당시 당쟁이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부정행위의 과거시험뿐만 아니라 평균 정원이 200이던 성균관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생활이 원칙인데 방은 각 28개, 도합 56개의 방이 있었다, 이 또한 한 방에 1명, 2명, 3~4명, 10명씩 묵었는데 당시 권력층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횡포와 부정을 저질렀다.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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