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행 - 21

농민으로 신분승격이 된 백정에 대한 멸시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백정은 외진 곳에 따로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했고 옷차림만으로도 구별되었다.
중치막이나 명주옷을 입을 수 없으며, 새끼 꼰 끈이 달린 패랭이를 써야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내건 폐정개혁안에 “백정 머리에 쓰는 패랭이를 벗겨버릴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백정은 결혼식을 할 때도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으며, 죽은 뒤 상여를 쓸 수도 없었다.
백정 아닌 사람을 만나면 허리 굽혀 인사해야 하고 상대가 어린아이일지라도 깍듯이 존댓말을 써야 했다. 백정의 자식은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다.

백정에 대한 차별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 폐지가 공식 선언되면서 법제상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식과 관습 속에는 그들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923년, 백정에 대한 차별 타파와 신분 해방을 부르짖는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도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 중에는 돈을 많이 모은 부자가 여럿 있었다.
도살업은 이익이 많이 남는데다가, 백정은 옷차림부터 사는 집까지 엄격한 제한을 받았으므로 돈 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진주의 이학찬, 의령의 장덕찬은 일제 강점기 때 손꼽히는 백정 부호였다.
형평운동에 앞장섰던 장지필은 바로 장덕찬의 아들이다.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독선생, 즉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에 유학까지 한 장지필은 취직하려고 호적을 떼었다가 ‘도부屠夫’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크게 충격 받고 그 뒤 형평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형평운동은 백정차별 등의 나쁜 관습과 신분제를 없앤다는 의미와 평등사회를 바라는 미래지향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는데 1923년4월24일 진주 대안동 진주청년회관에 약 70여명의 사람이 모여 형평사를 창립했다. 참석자 대부분 백정출신이었지만 사회운동가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장지필, 이학착, 하석금, 박호득 등이 참가하여 지원하였다.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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