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행-23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6(1740) 91일 기사에, 영조는 한양을 떠나 송도, 지금의 개성에 능행 중이었다.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를 둘러보고, 조선 2대왕 정종의 능인 후릉과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을 참배하는 길이었다.

폐허가 된 고려의 궁궐터를 돌아본 뒤 후릉으로 향하던 영조가 문득 신하에게 물었다.

부조현不朝峴이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부르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신하 주서 벼슬의 이희원이 대답했다.

태종께서 과거를 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 50여가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두문불출했으므로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했습니다.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두문불출에서 두문동이 나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영조는 不朝峴이라는 세글자를 써주며 비석을 세워 기념하라 했다.

이로써 두문동과 두문동 충신들은 세상에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두문동 72. 그러나 처음부터 72명이 아니었다.

실록에 다르면, 영조 당시 확인된 인물은 고작 둘, 임선미와 조의생 뿐이었다. 정조 때 세명, 그 후 차츰 숫자가 불어나는데, 72명의 명단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100년이 더 지난 뒤인 19세기 후반이었다.

72명의 면면도 정몽주가 들어 있는 자료, 없는 자료 등 기준이 달랐다.

1872년 여주 이씨 집안에서 발간한 기우집, 1924년에 발간된 전고대방등이 72현의 등재 기준이 달랐다.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개성에 두문동서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오늘날 두문동 72현의 그 후손들은 조선왕조에 출사하여 대부분 벼슬을 했다. 목은 이색의 아들은 태조 때, 야은 길재의 아들은 세종 때, 우현보의 아들은 태종 때 관직에 나갔다.

조선의 명재상 황희도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동지들의 권유에 의해 출사하여 세종 때 재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황희가 죽은 지 430여년이 지난 뒤 고종 27(1890)에 후손들의 글을 모은방촌선생청무실사에 기록이 나온다.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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