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주

본 지 편집국장

권력, 남을 강제할 수 있는 힘. 이 막강한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까.
그 힘을 공익에 쓰는 경우와 사익에 쓰는 경우,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서로 비교되는 요소가 상당히 많은 인물이다. 똑같이 1917년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에 권력의 정상에 올랐으며 (박정희:1961년, 마르코스:1965년) 둘 다 경제적 위기 극복과 국내 질서 확립 및 국제적 위상 제고 등에 큰 역점을 두었다.
또 권력의 정상에서 3선 개헌의 정치적 승부수를 걸었으며 (한국:1969년, 필리핀:1973년) 장기집권(박대통령:18년, 마르코스:21년)으로 국가를 다스리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것도 비슷하다.

둘의 집권이 시작될 무렵, 필리핀의 GNP가 한국의 GNP보다 훨씬 높았다.
당시 국제 외교무대 중심에는 필리핀인 ‘로물로’ UN의장이 있었으며, 60년 필리핀은 1인당 국민 소득 256달러, 경제규모 세계 19위였을 때, 한국은 102달러였다.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월등히 앞선 국력을 자랑했다. 그 이후 절대빈곤 국가를 산업화가 완성된 국가로 만든 박정희의 지도력이 빛을 발했다.
집권이 끝난 18년 후의 결과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GNP가 제자리걸음이고 복지는 후퇴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은 GNP가 몇 십 배로 성장, 세계 10~12위를 기록했고 복지수준은 1등 선진국이 되었다.

지도자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작든 크든 권력을 쥐어줄 때는 국민의
바른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지도자를 뽑는 수준이 바로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 되는 것이다.

권력은 누구나 꿈꿀 만한 것이지만, 책임과 선악의 판단에서 사사로운 이익을 버릴 수 있어야하기에 예부터 선비는 오히려 출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 없이 권력만 움켜쥐는 세태에서 권력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 역사 앞에 죄를 짓는 행위다.
소유의 평등을 앞세워 북한 권력을 잡는 김일성 정권이 3대를 이어 소수의 사익에 좌지우지되는 현세에서 고통스런 북한 주민의 존재가 무시되고, 소유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웃지 못 할 비극이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정초 '유시유종(有始有終)'이란 붓글씨를 써서 언론에 공개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뜻의 이 말에 정권을 아름답게 끝맺음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임기 종료를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각오는 며칠 안 가 한보 비리(非理) 사태가 터지면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흔한 은행 대출 비리인가 했던 사건은 대통령의 아들을 교도소로 보냈고 결국 IMF 외환 위기로 이어졌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과거 대통령들-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치군인을 포함해서-은 세상의 상식을 두려워했다. 상식과 어긋난 일을 벌일 때는 세상의 눈치를 살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김병로 대법원장이 사법권 독립을 명분으로 저항하자 더 밀고 나가지 않고 뜻을 접었다. 세상이 대법원장 편이었기 때문이다. 단독정부 수립 문제로 갈라섰던 백범(白凡)의 아들을 군(軍)에서 내보내지 않고 훗날 참모총장이 될 길을 터 주었다. 세상의 상식이 그래야 마땅하다 했기 때문이다. 독재로 흘러 4·19 혁명을 맞았던 그는 마지막 순간 '젊은이가 불의(不義)를 보고 일어서는 것은 당연하다'며 상식을 되찾았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모든 질서의 시작이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기본도 다를 게 없다.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부는 국민이 투표로 맡긴 권력을 행사하지만 그 결과에 따른 책임 소재(所在)를 흐지부지 못한다. 과거 두 대통령은 자식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부모 자식 간의 질긴 인연(因緣)에서 모진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정권과 나라가 무너지고 만다는 절박함에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다. 국민은 선거로 대통령을 뽑아 5년 동안 권력을 위임한다. 대통령은 그 권력으로 행정부와 사법부의 핵심 자리에 대한 임면권(任免權)을 행사한다.
청와대는 인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뻐꾸기시계처럼 '임면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울었다. 대통령 본인이 누가 자신에게 임명권(任命權)을 주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결과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의·대통령을 위한·대통령에 의한 정부'가 되고 말았다. 링컨은 '국민의·국민을 위한·국민에 의한 정부는 지상(地上)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권력! 지니고 놀면 누구든 악취를 풍기는 듯하다. 그 권력을 오래 쥐고 싶어서, 어제 한말, 오늘 하는 말이 매일 다르다. 초대 대통령을 반미파, 친일파로 산업부흥 대통령을 독재자로 몰아 부치는 정치패악질을 하더니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이용 앵벌이단체, 운동권 돈벌이, ‘울산사건’공소유지를 위해 조사를 하던,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던 검사를 외지로 내 치고, 수사팀을 공중분해하는 검찰패악질, 친박, 비박을 비아냥하더니 결국 그들 또한 친문, 비문으로 구분지어 여당 전당대회에서 이낙연 의원이 민심 시험대에 올랐다.

“자가 격리 때 대통령이 제일 많이 생각났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야당에 양보할 것은 양보하는 원칙있는 협치”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친문만 바라보는 대통령바라기 이 대표가 충실한 국민의 민심을 전달자가 될 수 있을지, 야당과 진정한 협치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딴판정치’가 아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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