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하영갑

시인,수필가,이학박사
시림문학회 회장
경남생태환경문학회 상임고문
낙동강수필문학회 심사위원

하영갑
논설위원 하영갑

고속도로 차창에 스치는 무덤들. 현세(現世)에 허허로웠던 삶의 징표가 후세의 대문 앞에서 잡초에 묻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손의 효심(孝心)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 듯 수줍음과 자랑스러움이 대조를 이룬다. 며칠 전에 ‘코로나19’가 걱정되어 수도권과 대도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못 오게 하고 장자장손인 형님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벌초를 마친 나로서는 감사하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금년을 넘길 수 있지만 이 번 주가 마지막이 된 듯한 벌초 일에는 다들 얼마나 큰 걱정을 안고 붐빌지...

 복잡한 세상, 한 평생 마치는 마감일까지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살이. 죽음 속의 삶도 후손들에게 눈치 받고 걱정 끼쳐서야 되겠는가. 흙먼지 쌓이고 날려가는 허전한 방, 소제야 누가 한들 어떠랴마는 그래도 내 혈손이 마음먹고 하는 청소를 늘 반갑게 기다리지 않았는가. 더욱이 망자(亡者)의 움직임, 소위 귀신같은 움직임을 앞서 저지르고 다니는 ‘코로나19’가 조상들의 방청소까지 막아서니 이를 어쩌겠는고. 후손의 안녕을 가로막는 일이라.

 안타깝지만 “내 조상 벌초는 내가 반드시 내가 해야 하겠다”는 생각. 이제 더 이상 미련을 버려야 할 때인가 싶다. 선대의 벌초는 고사하고 자신의 입치레도 제 새끼 돌봄에도 ‘고통’이라는 단어가 들어야 말이 되는지라 무엇을 바라랴. 그렇게 어렵고 힘들며 한갓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벌초!
이젠 그만두려면 그만 둬라. 죽음을 애통해 했던 선조(先祖)의 그리움을 현대과학의 멋쩍은 소음에 묻혀 날리고 네 맘대로 살아가렴. 그래, 설사 그럴지라도 다음 몇 가지만은 실행하고 낫과 예초기를 버려라.
 먼저, 선대(先代)에게 다하지 못한 나의 효심을 크게 애통해 하자.
다음은 세워지고 놓인 조형이나 석물이 있다면 거기에 새겨진 문자나 형상은 지우자.
마지막으로 봉분이나 자리했던 터는 원형대로 복구하자.
그런 다음 자신의 죽음 후 뒤처리도 후손에게 짐을 지우지 말자는 뜻이다. 그리하여 맑고 밝은 후세, 깨끗한 ‘죽음환경’으로 더럽고 무거워져가는 ‘환경공해’ 예방에 작지만 큰 행동에 뜻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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