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 나들이-37

김만중은 조선 숙종대의 정쟁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후 그의 대표작 구운몽은 평안도 선천에서, 사씨남정기는 경상도 남해 유배지에서 쓴 작품들이다.

 

18세기의 학자 윤동후는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겪은 일들과 잡문을 기록한 수주적록이란 책을 남겼는데, 청학음이라 하여 저자가 청나라 사람과 교류하면서 언어 소통을 위해 한자 다음에 만주어를 한글 발음으로 기재한 것이 눈에 띈다.

추사체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학자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 대표작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보냈다. 역시 유배지 제주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유배를 학문 완성의 기회로 삼은 대표적인 학자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의 넓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마현, 정약용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학문 대부분은 유배지인 강진의 다산 초당에서 목민심서경세유표를 완성하였다.

정약용은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신유박해)의 여파로 강진으로 유배를 갔고 그 곳에서 18년 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목민심서를 비롯해 그의 개혁안을 담은 저술 500여 권을 여유당전서로 완성할 수 있었다. 유배지 강진이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의 근거지와 가까웠고, 초의선사가 활동하던 백련사와 인접한 것도 다산에겐 큰 행운이었다.

다산은 윤선도, 윤두서로 이어지는 해남 윤씨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많은 서책을 접할 수 있었고, 초의 같은 고승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신유박해 때 정약용과 함께 유배되어 흑산도에 머물던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어류를 관찰하면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오늘날에도 어류학 백과사전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만중이나 정약용 형제에게 있어서 유배라는 삶의 시련은 스스로를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좌절의 시기에 자신을 가다듬은 학자들은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구운몽사씨남정기, <세한도>, 여유당전서등은 유배라는 조선시대 정치 문화의 산물이었다.

[타임머신]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