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 나들이 39

사도 세자의 운명이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영조38(1762) 5월에 있었던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나경언이 고변한 내용은 세자가 주변의 환시(宦寺)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경언은 고변으로 인해 친국(親鞫: 임금이 친히 중죄인을 국문함)을 받던 중 세자의 비행 10여 조를 담은 글 한 편을 다시 영조에게 올렸다.

영조는 나경언을 사형에 처하여 고변 사건을 일단 마무리했지만 20여 일 후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버렸다.

이를 보면 나경언의 고변과 세자의 죽음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변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특히 나경언이 고한 세자의 비행이 사도 세자의 죽음과 직접 관련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영조는 나경언을 처단한 후 세자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 주거나 세자의 비행에 관련된 사람을 찾아 죽이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처는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나경언이 처음 제기했던 세자의 역모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일각에서는 이를 사실로 인정한다.

세자가 영조 37(1761) 3월에 자기대신 내관을 앉혀 놓고 영조 몰래 평양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바로 이 평양행이 영조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준비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 때문에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지만 정상적인 생활을하기도 힘들었던 세자가 과연 쿠데타를 모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세자가 평양에서 돌아오자 평양 밀행을 문제 삼은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라 올라올 정도로 세자의 움직임이 공공연히 간파당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역모를 꾸미기는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자 세자는 모함이라며 영조에게 나경언과 면대케 해 줄 것을 청하고, 또 직접 나경언의 동생 나상언을 잡아다 사주자를 대라며 심문까지 하며 결백을 밝히려 했지만 헛수고로 끝나 버렸다.

현재로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사도 사제가 정말 역모를 꾸몄는지 그렇지 않으면 모함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진실은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만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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