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정신 뿌리 충절공 하공진 장군

▲ 경절사전경
▲ 경절사전경

충절도시 진주이름의 효시 하공진 장군

120년 역사 선화당도 중요하지만

천년역사 경절사는 더욱 중요

구국 충절의 보훈시설 경절사

진주 정신이란 누가 뭐래도 충절이다. 국내 많은 사람들은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혈전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을 진주의 상징처럼 떠올리곤 한다.

진주대첩의 수장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민관군으로 진주성 대첩을 이룩하였음과 진주 역사에 있어서 구국의 항전을 두고 도시 진주를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고 있다.

그러나 진주 정신의 뿌리를 찾아 나서다 보면 그보다 훨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충절의 도시이름의 효시는 고려 초 거란과의 전쟁에서 비롯하였으며, 11세기 고려 현종 때에 진주 출신 하공진 장군에 이른다.

충절의 도시 진주그 이름의 효시는 고려 현종 대의 하공진 장군에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거란의 침입에 대항하여 충절을 지키다 순절한 하공진은 국가를 위하여 적국의 볼모가 되어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를 좇아 신명을 바친 장군이다.

진주 출신인 장군의 죽음은 곧 위국충절의 상징이 되어 하공진 장군의 정절을 떠받든다는 의미의 경절사에서 부터 진주를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는 계기가 되었다.

진주성 내에 북장대 아래에 있는 경절사는 고려 초 거란에 대항하다 순절한 하공진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적지만 진주성에 모셔진 인물들과 같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로 기리기 위해 진주성 안에 모셔졌다.

경절사는 고려 초 거란에 끝까지 대항하다 순절한 충신 하공진(河拱辰)[?~1011]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804(순조4)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落水菴)에 창건하여 향사를 봉행 해 왔으나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향사를 일시 중지하였으며, 1869년 부조묘(不祧廟)로 되었다. 그후 1992년 진주성 안에 모시고 경절사로 고쳤다.

후손 하우(河寓)가 지은 경절사상량문(擎節祠上樑文)과 하용환(河龍煥)이 지은경절사우개기문(擎節祠宇開基文)에 하공진의 충절과 사당을 짓게 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10세기 후반과 11세기 초기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는 초원 제국의 대정복자 요나라(거란)의 성종(야율문수노)이 주도했다. 거란의 성종은 동아시아 패권의 한 축이었던 고려를 정복하고자 전쟁을 일으켰고 서희의 담판으로 유명한 1차 거란전쟁에 이어 2차 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역전의 용사 형부낭중 양규, 구국의 영웅 명재상 강감찬과 함께 고려의 기상과 진주의 충절 정신으로 대활약한 이가 있으니 바로 그가 진주 출신 충절공 하공진 장군이다.

충절공은 단순히 현대인들에게 진주 하씨의 시조로만 알려져 있지만 시대적 영웅으로서 재조명 받을 필요가 있다.

고려의 정사 '고려사'와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에 의하면 거란이 쳐들어오자 고려 왕실은 항복을 고민하다가 강감찬의 의견으로 전략적 철수를 감행한다.

당시 하공진 장군은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했다. 그는 현종의 사절로 요 성종을 만나 현종의 친정과 더불어 하공진 장군은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돌아가는 거란군을 양규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고 거란군은 수많은 피해를 입고 돌아갔다.

하공진 장군은 거란에 볼모로 잡혀가게 됐다. 수도 연경에서 철저한 감시 속에 여러 번 고려로 탈출을 감행하다가 이 사실이 탄로나 성종에 의해 모진 고문과 회유를 받게 된다. 하지만 나라에 대한 굳은 충정으로 완강히 거절했고 이를 비웃듯이 모욕스러운 언행으로 성종을 격분시켰다, 분노한 성종은 참형을 내려 끝내 하공진 장군은 타국에서 순국하게 됐다.

 

거란의 볼모를 자처,

아시고려인 불감유이심(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 이 새겨진 사적비
아시고려인 불감유이심(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 이 새겨진 사적비

나는 원래 고려인으로 두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외쳐

요나라 성종의 회유 거부

적국에서 순국, 고려는 하공진의 충절을 기려

나라를 위한 진주 사람의 충절로 진주정신의 요람

서기 1012년 고려 현종은 충절공이 요나라 성종의 회유를 끝내 거부하다 적국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손에게 상을 내려 그의 충절을 기리게 했다. 이러한 하공진 장군의 구국을 위한 희생이 있었기에 고려는 다시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며 거란과의 3차 전쟁에서 귀주대첩을 끝으로 승리하게 됐다.

거란과의 전쟁이 당시 동아시아 패권 싸움에서 매우 귀중한 고려의 승리였던 만큼 반드시 하공진 장군의 숭고한 희생과 충절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진주사람 하공진 장군의 희생이 있었기에 충절의 도시 진주가 오늘날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진주성내 하공진 장군을 모신 사당인 '경절사' 이전을 위한 진주시의 시도가 있다는 말에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와 충절의 도시를 지향하는 진주시는 과연 11세기 동아시아 국제적 영웅 하공진 장군의 정신을 짓밟으려 하는 것일까

충절의 도시진주시의 브랜드를 포기하는 것일까?

충절의 도시 진주를 상징하는 '경절사'는 역사와 전통에 따라 반드시 현 위치에 존재해야 하며 오히려 국가와 진주시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현대인들과 후세에 충절의 정신을 전할 진주의 랜드 마크로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오히려 11세기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연극사에 가장 빛나는 금자탑인 '하공진 놀이'를 문화콘텐츠화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영상물로 제작해 국내외 홍보하여 한류관광의 중심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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