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 나들이 41

성군으로 추앙을 받는 조선의 4대왕 세종도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국(신라, 백제, 고구려) 시조의 사당을 세우라는 영을 내린 다음,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의 일이다.

예조판서 신상이 계하였다.

삼국의 시조의 묘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이겠고, 백제는 전주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이에 이조판서 허조가 계하였다.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의 전장과 문물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삼국이 정립, 대치하여 서로 막상막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세종실록> 9(1427,정미년) 313

조선에서 가장 머리가 좋았다는 자로 꼽히는 영의정 한명회도 고구려와 백제를 폄훼했다.

한명회가 아뢰기를,

예전에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이 정립하였는데, 오직 신라만이 나라가 부유했으니 그 백성들이 농사에 힘쓴 때문입니다. 지금의 경상도가 곧 예전 신라의 땅인데, 그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는 것이 다른 도에 갑절이나 되어 무릇 제언, 천방을 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 하였다.

-<성종실록> 1(1470,경인년) 410

신라의 백성들이 부유할 수 있던 것이 농사에 힘쓴 탓이라는데, 그렇다면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은 농사에 전념하지 않아서 가난했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는 기록 가운데는 앞서 말한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라는 것도 포함된다. 사대의 붓을 잡았던 자들까지도 단군이 최초로 천명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비록 동방으로 제한하는 장치를 두었지만 단군의 정통성과 유구함이 잘 입증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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