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공진-거란군 2차침입, 거란 성종교섭 볼모로 순국-충절공
하륜-조선태종 이방원 책사-진산부원군
하수일-남명학파 일원-남명 학문을 대변
하항-남명조식 문하 최경영과 동문수학-소학 효행실천
하경복-북방경비, 조선군사 교재 『계축진설』 편찬

진주는 고려 성종14(995) 12목을 설치하면서 절도사를 두었다. 당시 경상도 지역을 3개 도로 나누었는데, 상주 관할의 영남도(嶺南道), 경주 관할의 영동도(嶺東道), 진주 관할의 산남도(山南道)이다. 이때부터 진주는 경상도의 큰 고을로 발전했다.

특히 진주에 절도사를 두어 진주정해군(晉州定海軍)’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진주에 주재하는 절도사가 남해안 쪽 바다를 지키는 것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진주목으로 이름이 높던 진주에 조선(朝鮮) 고종(高宗) 33(1896413) 경상남도(당시 이름은 경남관찰도)란 지방행정구역이 설정되었다. 이에 진주성에는 경남도청이 들어서게 되고,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관찰사가 도정 업무를 보게 됐다.

선화당은 원래 경상도 우병영(경남·북의 낙동강 서부지역을 총괄하던 육상방어기구)의 관청이었던 운주헌(옛 이름은 관덕당)’인데 그동안 이 곳에서 진주병사가 병무를 보았다가 우병영이 폐지되고 관찰사가 부임하면서 선화당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경남관찰사는 조선말 경상도가 남북으로 나눠진 후 진주에도 주재하면서 경남도정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 된 것이다.

하지만, 경남관찰사도 예전의 경상도관찰사처럼 관할지역 내에서 만큼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조정의 명령을 따랐지만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경남지역에 대해서는 경찰권 · 사법권 · 징세권 등을 행사하며 지방행정상 절대 권력을 누렸다. 특히 관찰사가 주재하고 있는 진주의 경우 관찰사의 권력남용은 더욱 심했다. 따라서 관찰사가 있던 선화당은 백성들에게 위민기관이 아니라 원성의 대상으로 밖에 인식될 수 없었다. 관찰사 조시영이 보인 행태는 관찰사가 부릴 수 있는 권력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8984월 조시영의 학정을 더 이상 보다 못한 어느 진주 사람은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에다 편지를 보내 그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신문 189855일자 보도에 따르면 경남관찰사 조시영은 진주군에 사는 죄 없는 백성 강대중을 구타해 옥에 가두고는 엽전 1만 냥을 빼앗은 후에 그를 풀어 주었다는 것과 윤재선에 대해서는 그의 딸을 자신의 첩으로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하고 옥에 가두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관찰사의 절대 권력이 종종 문제가 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징계를 내리고 관찰사 이지용(18998~19007)의 경우 정부가 그에게 실정의 책임을 물어 파면시킨 경우에 해당했다.

경절사
경절사

 

<역사 속의 진양하씨의 대표적 인물>

하공진(충절공)-진양하씨 시조로 고려 현종조 충절신이다.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호부원외랑 고영기와 함께 군사 20여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거란 성종을 만나 군대를 철수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거란에 볼모로 잡혀가 거란 왕이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나는 고려의 신하로서 감히 두 마음이 있을 없다하며 거란 왕을 크게 격분시켜 결국 심간(心肝)을 씹히는 장렬한 죽음을 당하였다.

1052(문종6)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추증하고 그의 형용을 기린각(麒麟閣)에 붙이고 그 공훈을 기록했다. 1957년에는 진주성 내의 공진당(拱辰當)자리에 경충사(景忠祠)를 세워 공의 위패를 봉안했다. 1992년 진주성지를 정화할 때 경충사가 헐리면서 동쪽으로 약간 옮긴 자리에 사당인 경절사(擎節祠)와 강당인 충의당(忠義堂)을 새로 건립하여 지금껏 공의 뜻을 기리고 있다.

하공진
하공진

하륜(河崙)1347년 고려시대 순흥부사를 지내고 있던 하윤린(河允潾)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365(공민왕 14) 문과에 급제,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지만 신돈과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하여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올랐다. 밀직사첨서사(密直司簽書事)를 거쳐, 1388(우왕 14) 최영(崔瑩)의 요동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楊州)로 귀양갔다.

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따르면 하륜은 이인임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고. 조선 개국 후 1393(태조 2)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무악(毋岳) 천도를 주장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이듬해 중추원첨서사(中樞院簽書事)에 전보되었다.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표전문(表箋文)이 불손하다고 트집 잡자 1396년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해명하였다.

1398년 충청도관찰사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00(정종 2) 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고, 이방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권력의 실세로 군림했다. 그해 명나라 태조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가서 정종의 왕위승습(王位承襲)을 승인받고 귀국하였고, 문하부참찬사에 오르고 다시 의흥삼군부 판사(義興三軍府判事)를 거쳐 우정승으로 진산백(晉山伯)에 진봉되었다.

 

그해 태종(이방원)의 즉위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보고하게 만들었으며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재정의 확충을 도모하였고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좌정승(左政丞)에 복관, 승추부판사를 겸하였다. 그해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사(登極使)로 가서 조선왕조의 완전인준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이첨(李詹)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1409년 의정부영사가 되어 군정(軍政)을 개정한 데 이어 춘추관영사로 태조실록(太祖實錄)편찬을 지휘하고, 1412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1416(태종 16) 70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진산부원군에 진봉되어 왕명으로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1416). 문집에 동국사략(東國史略),호정집이 있다.

하륜 [河崙] (두산백과)

 

하수일(송정)은 조선중기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부 하희서(河希瑞)가 남명 조식과 친분이 있었으며, 7세 때에는 남명의 제자 각재 하항(1538~1590)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그는 남명학파의 일원으로 교유하던 사람들도 모두 남명과 학문적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평생 공부하던 유학은 물론이고, 문학에 대해서도 남명의 영향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이상필교수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송정은 남명이 남긴 영향을 입어 실질적인 학문에 매진하였고, 문장이 뛰어났지만 문장에만 힘쓴 사람과는 달리 그 내용은 실상 그의 실질적인 학문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채제공이 일찍이 말 한 것이다.

남명조식
남명조식

 

하항(河沆)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서 본관은 진주, 자는 호원(浩源), 호는 각재(覺齋), 1538(중종33)에 태어나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67(명종22) 사마시에 합격한 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질 한 후 어머니 침실로 찾아들어 문안을 드리니, 여러 문인들이 말하기를, ‘소학의 가르침을 실제로 보여준다고 칭송하였다. 말년에 진주 수곡면 대각촌에 은거 하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다가 1509(선조23)에 별세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사로는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최영경과 동문수학하면서 서로 깊이 사귀었으며, 특히 소학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장은 고답적이어서 사우들이 설중매(雪中梅)라 일컬었으며, 시문도 소박하고 박진력이 있었다.

 

하경복(河敬復)은 조선전기 판중추원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시호는 양정(襄靖)으로 1377(고려 우왕3)에 태어나서 1438(세종20)에 별세했다. 본관은 진주이며 1402(태종2)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지내고, 상호군이 되었다. 14010년 무과중시에 급제한 뒤 첨지총제(僉知摠制)가 되었으며, 길주도조전지병마사(吉州道助戰知兵馬使)를 거쳐 경원병마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첨지총제가 되었고, 다음해 경성등처병마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가 되어 국경을 수비하였다.

1414년 동지총제에 올랐고, 1423(세종 5) 함길도절제사를 거쳐 1427년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1430년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 함길도병마절제사를 겸임하였다. 1432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15년간이나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였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야인들을 진무하여 변경지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433년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편찬할 때 총재로 참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계축진설(癸丑陣說)이다.

이것을 진도(陣圖)와 함께 주인(鑄印)으로 간행하여 군사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1435년 찬성에 승진하였고, 곧이어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다시 경상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활을 잘 쏘았으며, 개국 초기에 국가의 무비(武備)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 국가의 기틀을 견고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수일 선생을 모신 진주하씨문중재실 낙수암
하수일 선생을 모신 진주하씨문중재실 낙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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