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그 이름의 展開過程)

 

우선 진주(晉州)라는 지명에 대한 어원적(語源的)의미를 살펴보면, 원래 ()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64중에서 ((): )((): 번창)의 의미로 표기됨으로써, 진주(晉州)라는 고을은 일찍부터 명성지지(明盛之地)로 풀이되어 왔다. 그리하여 고대로부터 진주는 예부터 태양이 적당하게 비쳐져서 농사가 매우 잘 되는 지방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이어 진주(晉州)라는 지역 명칭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 보고자 한다.

진주는 일찍부터 주변의 곳곳에서 청동기(靑銅器) 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오래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삼국 시대 때부터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진주는 삼국시대 때에는 강주(康州)라고 불렀다. 강주(康州)에 대해 三國史記⟫「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康州神文王五年, 唐垂拱元年分居陀州置菁州, 景德王改名, 今晉州( 강주는 신문왕 5, 당나라 수공(垂拱) 원년(685)에 거타주(居陀州)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경덕왕이 강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진주이다.)

그러나 거창현(居昌縣)의 연혁을 설명하면서 거창군(居昌郡)은 본래 거열군(居烈郡)<혹은 거타(居陀)라고 이른다.>인데 경덕왕이 그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라고 한 것을 보면 본래 진주와 거창은 모두 거열군에 속했다가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地理志에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晉州牧本百濟居列城, 新羅文武王二年取而置州, 神文王四年分居陀州置菁州摠管, 景德王改爲康州, 惠恭王復爲菁州. 太祖又改康州, 成宗二年初置十二牧, 州其一也. 十四年置十二州節度使號晉州定海軍, 屬山南道. 顯宗三年廢爲安撫使. 九年定爲牧爲八牧之一. 別號晉康. 又菁州, 又號晉陽.(晉州牧은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일명 居陀>이었는데, 신라 문무왕 2(662)에 탈취하여 를 두었고, 신문왕4(684)에 거타주를 나누어 청주총관(菁州摠管)을 두었다. 경덕왕 때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청주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때 또 강주로 고치고, 성종2(983)에 처음으로 12목을 두었는데, 강주도 그중 하나였다. 성종 14(995)12주 절도사를 두면서 진주정해군(晉州定海軍)이라고 부르고, 山南道에 소속시켰다. 현종 3(1012)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를 두었다. 현종 9(1018)에 목으로 정하여 8목의 하나가 되었다. 별호는 진강(晉康)이다.<성종 때 정하였다.> 또 청주(菁州)라고도 하였고, 진양(晉陽)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진주는 본래 백제 땅이었다. 그러던 것이 문무왕 때 신라로 귀속되었고, ()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신문왕 때 거열주에서 청주(菁州)로 이름이 바뀌고, 경덕왕 때인 757년에 강주(康州)로 개칭되었다. 그러다가 혜공왕 때 다시 청주로, 고려 태조 때 다시 강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성종 때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강주목이 설치되었고, 현종 때 진주목으로 개칭되면서 8목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이어서 世宗實錄』 「地理志에는 그 이후의 내력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本朝太祖元年壬申, 以顯妃康氏內鄕, 陞爲晉陽大都護府, 太宗二年壬午, 還爲晉州牧.(본조 태조 원년 임신년에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인 까닭으로 올려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를 삼았고, 태종 2년 임오년에 도로 진주목으로 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진양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태종 때인 1402년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그 후 진주는 12목 중의 하나로, 경북 상주(尙州)와 더불어 경상우도(한양에서 보았을 때 낙동강의 오른쪽 지방, 즉 경상도의 서쪽 지방)를 대표하는 고을이었으며,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은 진주목으로 불렀고, 진주 목사가 관내를 다스렸다.

고종 32(1895)에는 지방 제도의 개정에 관한 안건을 칙령으로 반포하여 부, , , 현의 명칭을 으로 일원화하고 온 나라를 23부로 나누었다. 진주부는 그중 하나였는데, 진주군은 다른20개 군과 함께 진주부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96년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경상남도의 관찰부가 진주에 두어졌다. 그러니까 진주가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던 것이다. 1913년에서 1914년 사이에 일제의 총독부는 군과 면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진주군에 소속된 면을 50개에서 19개로 줄이는 한편, 이 과정에서 진주 관아 가까이 있는 면들을 모아서 진주면을 만들었다. 그리고 1925년에 도청은 부산으로 옮겨갔다. 그 후 진주면의 규모가 커지면서 1932년에 진주읍으로 승격되고, 1939년에 다시 진주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진주읍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진양군(晉陽郡)으로 개칭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에 비로소 지금의 명칭인 진주시가 되었고, 1995년에 진주를 둘러싼 진양군을 통합하여 오늘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진주는 이제 한 도를 대표하지 못하고 경남 서부의 중심 도시 역할에 그치고 있다.

진주에 촉석루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만일 진주가 12목 중의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하나의 군이나 현의 지위에 있었다면 목사가 주재하면서 다스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렇게 웅장한 규모의 누각을 세울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촉석루가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이 되고 보수가 되었던 것도 대체로 목사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데, 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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