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 총 면적은 약 53,000평이고, 둘레는 1.7km이며, 성(城)의 평균 높이는 대개 5∽8m로 되어 있다. 상기와 같은 정보는 지역의 중요 문화재에 대한 관광자원(觀光資源)의 활용을 위한 기본적인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우리는 쉽게들 간과(看過)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수백 년 혹은 천여 년 동안 진주지역에 살아왔던 수많은 진주 시민은 물론, 지역의  향토사 전문가들조차도 상기와 같은 진주성의 기본적인 규모 및 현황의
 중요도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바, 오늘날 까지도 대체로 모두들 자기 지역의 훌륭한 문화재에 실질적 가치와 역사적 핵심을 정확하게 모르고 살아왔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지역 문화재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이러한 태도와 관점은 크게 잘못된 현상이라고 사료된다.
그리하여 이제 여기서 우리는 진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진주성(晉州城)에 대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문화재의 가치를 진정성 있게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 진주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어디 어디이며, 그들 입구마다의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진주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총 세 군데가 있다. 그 하나는 촉석문(矗石門)인데, 이곳은 진주성의 동쪽 문으로 촉석루(矗石樓)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 그러니까 촉석루만 구경하고 나올 양이면 촉석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빠르다. 또 하나는 진주성의 서쪽에서 호국사 쪽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쪽 길은 나름의 운치(韻致)는 있지만, 촉석루까지 가려면 언덕을 넘어서 한참을 가야한다. 그 대신 창렬사(彰烈祠)와 박물관을 들릴 수 있고, 이른바 ‘놀기 좋은 서장대(西將臺)’에서 쉬면서 남강을 발아래로 내려다보고 강바람을 실컷 쐴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입구는 진주성의 북쪽에 있는 공북문(拱北門)이다. ‘공북(拱北)’은 모든 별이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 듯, 백성들이 훌륭한 임금을 향하여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한다는 의미이니, 여기에서 벌써 목민관(牧民官)의 태도를 배운다.
‘공북문’이라는 현판을 올려다보고 진주성 북문으로 들어서서 몇 걸음 가면 오른쪽으 진주 목사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동상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왼손에는 장검을 잡고 오른 팔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모습이 뭔가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 오른쪽으로 경상남도 관찰사 청사의 관문이었던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문루를 두고 양쪽의 말끔이 정리된 잔디밭 사이로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곧장 남쪽으로 가게 된다. 단단하기로 이름난 진양석으로 쌓은 성가퀴에 다가서서 남강을 내려다보고 왼쪽으로 얼굴을 돌리면 촉석루의 웅장한 옆모습이 앞에 나타난다. 성가퀴를 따라 다가가서 촉석루의 북쪽에 서면 촉석루의 전모(全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웅장한 팔작지붕의 용마루가 힘을 단단히 주고 버티고 있고, 양쪽에서 내려오는 내림마루의 선도 크게 출렁이지 않고 힘차게 뻗어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바깥쪽으로 열리는 추녀마루는 끝을 살짝 쳐들어서 건물 전체가 경직(硬直)되지 않도록 해 준다. 이 세가지 마루를 연결해 주는 선을 따라 균일하게 바른 하얀 석회는 지붕 전체에 산뜻한 느낌을 더해 준다.
사실 한옥의 아름다움은 일차적으로 이 지붕의 선에서 느껴진다. 이 한옥 용마루(건물 지붕 중앙에 길게 뻗어있는 꼭대기 부분)의 곡선은 이른바 현수곡선(懸垂曲線: 기와지붕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용마루의 端雅(단아)한 선)이라는 것을 사용한다. 실의 양 끝을 느슨하게 잡고 있을 때 실이 처지면서 만들어지는 곡선이 바로 현수곡선이다. 한옥을 지을 때 용마루 양쪽 끝에서 두 개의 끈을 팽팽히 당겼다가 하나를 늦추어 용마루 곡선을 정하는데, 이때 중앙에서 두 끈 사이에 얼마만큼 간격이 벌어지게 하느냐에 따라 용마루 가운데가 얼마나 처지느냐가 결정된다. 촉석루의 용마루 선은 밀양의 영남루나 삼척의 죽서루(竹西樓)보다 선이 적게 쳐져있고, 청와대 용마루 선과 거의 비슷해 보인다. 그것이 촉석루를 다른 누각에 비해 좀 더 근엄해 보이게 만든다.
넓은 지붕 전체를 덮고 있는 골기(骨氣)와의 물매(수평을 기준으로한 경사도)가 매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처마 끝 가지런한 암막새(기와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 아래로 사각형의 부연(附椽:서까래 끝에 거는 짧고 방형의 서까래) 모서리와 원형의 서까래 모서리가 가지런하다. 그 처마 아래 걸려 있는 ‘촉석루(矗石樓)’라는 현판이 낮은 한식 담장 너머로 반갑게 맞아준다. 현판 글씨는 너무 힘을 들이지도 않고 많은 기교를 부리지도 않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느낌이다. 마치 찾아오기로 약속된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처럼 서두름 없이 차분하다.
진주성과 촉석루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우리나라처럼 성(城)이 많은 나라도 별로 없을 것이고, 우리나라처럼 곳곳에 누정(樓亭)을 품고있는 나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성곽(城郭)은 어쩌면 자신을 지키려는 안간힘의 상징이다. 누정은 여유와 운치를 누리려는 풍류와 낭만의 모습이다. 이 둘이 어우러지는 공간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성곽은 도성(都城)이나 진성(鎭城)도 있지만, 크게는 산성과 읍성(邑城)으로 구분이 된다. 산성은 산의 정상부나 경사면을 이용해 쌓는다. 피난 시에 적의 공격을 어렵게 하고 아군의 방어를 쉽게 하려는 의도로 축조하는 것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북한산성, 남한산성, 삼년산성 등 많은 산성이 있다. 산성은 특히 아픈 역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은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반면에 읍성은 지방의 관부(官府)나 민간의 주거 지역을 둘러서 쌓은 성이다. 궁궐과 종묘가 있는 수도의 도성은 성격이 비슷한 점이 있지만, 읍성과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때에 왕검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밖의 읍성에 대해서는 이른 시기의 기록이 많지않다. 일제강점기 때 읍성 철거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읍성이 헐렸으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읍성도 적지 않다. 수원의 화성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표적인 성곽이고, 그 밖에도 부산의 동래읍성,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전북 고창의 모양성(牟陽城),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樂安邑城)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진주성은 진주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남강 가에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남강을 건너 망진산을 마주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선학산, 북쪽으로는 비봉산, 서쪽으로는 석갑산과 숙호산에 둘러싸여 있다. 가까이에는 동쪽으로 진주대로가 있고, 북쪽으로는 진양호로, 서쪽으로는 서장대로가 진주성 둘레에 뻗어 있다. 진주성에서 가장 높은 곳은 서장대 부근인데, 그래 봐야 해발 고도가 대략5,6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엄연한 산성이었으며, 실제로 관청에서 편찬한 자료에는 ‘촉석산성(矗石山城)’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에는 주변들의 거주 공간이 아니었고, 진주의 관아도 지금의 진주성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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