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고종(1241년) 때에 창건된 촉석루는 숱한 전란(戰亂)과 외침(外侵) 으로 소실(燒失)과 중건(重建)을 거듭했다. 무려 세 차례의 소실과 열 차례의 보수(補修),그리고 두 차례의 중건이라는 고난의 역정(歷程)을 겪었다

촉석루의 창건,중건 그리고 보수에 대한 상기의 기록에 의하면, 촉석루 창건 이후에 완전히 소실되어 다시 세운 것이 두 차례이고, 보수한 것이 열 차례이다. 한 마디로 국내의 다른 지역에도 촉석루급의 수많은 누각 및 누정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촉석루는 그들 타지역의 누각들에 비해서, 시련과 아픔이 유달리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상기에 나타난 촉석루 건물 자체의 중건, 보수 외에도 단청(丹靑)이나 가벼운 보수 공사는 수시로 진행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4차 보수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 정식(鄭栻)촉석루중수기에서 촉석루는 임진란(1592)때 다행히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는 불행은 면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성여신(成汝信15461632)이 쓴 진양지에는 계사년(1593) 병화로 촉석루가 소실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두 기록이 모두 옳은 말이 되려면 임진년의 1차 전투 때는 다 불타지는 않았고, 계사년 2차 전투 때 소실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정식의 촉석루중수기1725년에 지은 것인데, 중수의필요성을 얘기하면서 굳이 계가년에 소실된 것은 외면하고 임진년에 다 불타지 않았다는 것만 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충(相沖)하는 상기의 두 기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서 참고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기도 하다.

 

15977월에 진주 판관으로 부임한 하응도(河應圖15401610)가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 亂後登矗石樓有感이란 작품이 있다. 왜란 후에 촉석루에 올랐는데 느끼는 바가 있어서 지었다는 작품이다. 7언율시 형식의 이 작품은 끝 두 구가 없어져 아쉽지만, 남아있는 부분에서는 촉석루가 소실되었다는 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15851664)1609년에 지은 시 촉석루우음(矗石樓偶吟)에도 높은 누각에 올랐다라는 표현이 다음에 나온다.

 

夢落仙區久- 선계를 꿈꾼 지 오래 되었더니

靑藜偶獨來- 청려장 짚고 우연히 홀로 찾아오네.

江深千丈水- 강물은 깊어 천 길이나 되고

石聳十層臺- 바위 솟아 십 층의 대를 이루었네.

形勝名長在- 경관 좋다 명성이 오래도록 자자한데

興亡世幾回- 흥망의 시절은 몇 번이나 돌고 도나.

高樓登眺處- 높은 누각 올라서 조망하는 곳에서

感歎一含哀- 느끼고 탄식하며 슬픔을 머금네.

 

상기 시를 지은 조임도는 임란 당시 8,9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촉석루에 올랐다는 말은 소실되기 전의 기억을 말한다고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높은 누각에 올라서라고 한 것은 실제로 시를 지을 때 촉석루에 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니, 당시에 촉석루가 다 타버리지는 않았다는 정식의 말과도 부합된다. 그러나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촉석루의 부속 건물 네 채가 모두 소실되었는데, 이 때 촉석루만 무사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전쟁 때 촉석루가 불에 탔는 데 옆에 있는 의기사(義妓祠)는 온전하였으니, 이때도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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