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주변에는 원래 네채의 부속 건물로써, 동쪽에는 능허당(凌虛堂)과 청심헌(淸心軒), 서쪽에는 쌍천당(雙淸堂)과 임경헌(臨鏡軒)이 익루(翼樓)로써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부속건물 들의 정확한 창건시기와 소멸시기를 알 수는 없고, 오직 몇몇 고전 기록에 의하면, 대략 1480년에서 1530년 사이에 창건되고, 소멸된 것으로 유추할수 있다.-

지금까지는 晉州라는 지명의 전개과정, ‘晉州城의 내력, 그리고 矗石樓의 창건(創建)과 중건(重建)의 역정(歷程)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본호에서는 진주성 내에 일찍부터 존립(存立)해 있었던 수 많은 또 다른역사문화적 흔적(痕迹)들 중에서 안타까운 사연으로 사라져 버린 과거의 유형(有形)의 구조물 들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특히 본보에서는 지난 날에는 촉석루 주변에 번듯하게 서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부속 건축물들에 관해서 공부하기로 한다.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는 그 역사가 서로 대비되는 면이 많이 있다. 먼저 1365년에 밀양 군수 김주(金湊)가 영남루를 지을 때 진주로 사람을 보내서 촉석루의 제도(製圖)를 그려오게 하였다고 하니, 사실상 촉석루는 영남루의 모델이 되었던 셈이다. 다만 영남루는 현종 8(1842)에 실화(失火)로 불 탄 것을 2년후인, 현종10(1844)에 다시 지은 것이, 오늘날 밀양 영남루의 건물인 데 반해, 촉석루는 한국 전쟁 때 또한번 소실(燒失)되었지만, 1960년도에 이르러 비로소 진주고적보존회(晉州古跡保存會)에 의해 재건(再建)되었지만, 근세에 이르러서는 결국 영남루가 촉석루 보다 문화재등급상(文化財等級上)으로는 훨씬 상위(上位)의 문화재로 되어 있다.

두 누각이 대비가 되는 것은 역사뿐만이 아니다.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함께 삼대 누각으로 불렸던 것도 그렇거니와 누각의 좌우에 부속 건물이 있었다는 것도 서로 통하는 점이다. 영남루는 왼쪽에 능파각(凌波閣), 오른쪽에 침류각(枕流閣)이라는 익루(翼樓)를 두어 연결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촉석루에도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서쪽으로 논개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義妓祠) 건물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촉석루와 한 묶음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성격도 완전히 다른 건물이다. 그렇다면 촉석루에는 어떤 부속 건물들이 있었으며, 또한 그 부속 건물들은 어떤 역사적 내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촉석루도 양쪽에 익루를 거느리고 있었다. 1481년에 간행된 東國輿地勝覽에는 촉석루 서쪽에 쌍청당(雙淸堂)이 있다고 하였으니, 쌍청당의 위치는 지금의 의기사가 있는 곳에 해당된다. 1530년에 간행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촉석루 동쪽에는 능허당(凌虛堂)과 청심헌(淸心軒)이 있고, 서쪽에는 임경헌(臨鏡軒)이 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이 부속 건물들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쌍청당은 동국여지승람에 언급이 되었기 때문에 1481년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나머지는 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481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539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나머지 세 건물도 1481년 이전에 지어졌는데, 소실되어동국여지승람을 간행할 때는 없었다가, 1481년에서 1530년 사이에 중건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리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동국여지승람에서 그런 내력을 말해 두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실제로 나머지 세 건물이 일찍이 지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晉陽志續修에는 능허당은 촉석루 동쪽 누각이다. 무오년에 연달아 건립하였다. 이름을 고쳐서 함옥헌(函玉軒)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481년부터 1530년 사이에 있는 무오년은 1498년 밖에 없으므로, 그 전에 지어졌다가 소실된 것이 아니라면 능허당은 그때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622년부터 1623년 사이에 성여신(成汝信)이 편찬한 晉陽志東國輿地勝覽에는 능허당으로 되어 있는데 언제 함옥헌으로 개명했는지 알 수 없다.”라는 말이 있으니, 개명의 시기는 늦어도 1622년보다 훨씬 이전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청심헌은 1519년에 별세한 강혼(姜渾)의 시에 그 이름이 등장하므로 늦어도 1519년 이전에 완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강혼의 문집인 목계일고(木溪逸稿)에 실려 있는 청심헌시 제목 아래에, “진주 함옥헌 동쪽에 있으며, 경상좌병사 이수일(李守一 15541632)이 세우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이 주석에 따르면 건축을 한 시기가 시를 지은 시기보다 훨씬 나중이라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주석은 1910년 문집이 간행될 때 보충한 것으로, 여기에서 말한 건립은 중건을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청심헌은 1604년에 이수일이 진주성을 축조할 때 중건된 것으로 밝혀졌다.

임경헌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진주 목사 이원간(李元幹)이 지었다고 하였으므로, 그가 15237월에 진주 목사에서 파직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이전은 23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중건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이렇게 보면 네 채의 부속 건물 가운데 청심헌과 능허당이 같은 시기에 지어졌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나머지는 모두 다른 시기에 지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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