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고려왕조는 물론, 500년 조선왕조를 거쳐 1950년대 전후 한국 근대에 이르기까지 삼남(三南)의 곡창과 선지(仙地)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堡壘)이자 요충(要衝)이었기에, 천고(千古)의 역사속에 숱한 외침(外侵)과 전화(戰禍)의 치명적 초토(焦土)의 상흔(傷痕)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애국의 문화적 상징물로 우뚝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선대 진주인 모두의 끈질긴 인고(忍苦)와 진주정신(晉州精神) 때문이리라.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1592년과 그 이듬해인 1593년에 계사순의(癸巳殉義)와 같은 큰 전쟁이 있었다. 첫 번째는 1592105일부터 10일까지 있었던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라고 한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진주성 공격을 계획하였다.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장이 군사 약 3만명(일본 측 자료에는 약 2만명)을 거느리고 김해에서 창원으로 진출할 때,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유승인(柳崇仁 15651592)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이를 막지 못하고 진주로 후퇴하였다.

그러자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의 휘하에 3,700여 명의 군사가 있었고,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 15571608)의 군사 백여명 등을 합해도 3,8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성 밖에서는 의병들이 힘을 모았다. 동쪽 방면에서는 삼가의 의병장 윤탁(尹鐸 15541593)과 의령의 임시 의병장 정언충(鄭彦忠), 그리고 곽재우가 파견한 선봉장 심대승(沈大承 15561606)이 약 5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달려왔다. 서쪽에서는 전라우도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15321593)와 전라좌도 의병장 임계영(任啓英 15281597)이 구원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와서 적을 견제하였고, 진주의 한후장 정기룡(鄭起龍 15621622)도 힘을 보탰다. 남쪽에서는 고성의 임시 현령 조응도(趙凝道 ?1597)와 진주 복병장 정유경(鄭惟敬 ?1593)이 이끄는 5백여 의병, 그리고 고성 의병장 최강(崔堈)과 이달(李達)등이 외곽에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북쪽 방면에서는 승려 의병대장 신열(信悅)이 이끄는 부대와 합천의 임시 의병장 김준민(金俊民 ?1593)이 합세하였다.

적군은 세 개 부대로 나누어 총포를 난사하면서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흙으로 높은 보루를 쌓아서 그 위에서 성을 내려다보며 포를 쏘기도 하고, 윤전산대(輪轉山臺)라고 하는 이동식 전망대 같은 것을 만들어 그 위에서 공격하기도 하였다. 또 긴 사다리를 만들어 성벽을 기어오르려고도 하고, 성 아래 해자(垓字)를 메우기 위해서 솔가지와 대나무를 쌓기도 하였다.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1593)은 동문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현자총통으로 산대를 공격하기도 하고, 돌이나 불에 달군 쇠붙이, 혹은 끓는 물이나 불을 붙인 짚단을 던지면서 대항하였다.

전투가 막바지에 달했던 1010일 새벽에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 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그리고 날이 밝자 왜군은 드디어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진주의 군민들은 진주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김시민은 끝내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순절(殉節)하였다. 사실 이 싸움은 2차 진주성 전투와는 완전히 별개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진주 대첩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두 번째 싸움은 1593621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 때는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여서, 왜군으로서는 앞선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雪辱)하는 한편, 강화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자는 목적으로, 93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조선에서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최경회, 그리고 안덕원과 이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충청병사 황진(黃進15501593)등이 이끄는 관군과, 창의사 김천일(金千鎰15371593), 의병장 고종후(高從厚15541593) 등이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 수가 도합 6, 7천 명에 불과하였다.

적군은 진주성 동문 밖에 흙을 모아 높은 언덕을 만들어 그 위에 흙집을 지어 성을 내려다보고 탄환을 발사하기도 하고, 또 성의 밑뿌리를 파서 성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그러던 중에 큰비가 내려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니, 적이 귀갑차를 동원하여 성벽 밑에 접근하여 성벽으로 난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신북문을 기습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성안에 남은 사람을 모조리 학살하였는데, 그 수가 6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황진은 전투 중에 탄환을 맞아 전사하였고,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은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의기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는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왜적은 비록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는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입은 피해가 막대하여, 더 이상 전라도를 향하여 전진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의 병사와 백성들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 가축들까지 모두 도륙(屠戮)을 당해서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진주성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줄 사람도 찾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절의를 지키다가 순국한 장졸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기록도 빠진 것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몇몇 인사들이 뒤늦게 기록을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방준(安邦俊)은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의병 부대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1596년 즈음에 진주서사(晉州敍事)를 써서 진주성 전투의 전말(顚末)이 인멸되지 않도록 대강 기록해 두었는데, 이는 후에 오성일기(鼇城日記)를 참고하여 쓴 것이라고 하였다.

황진의 손자인 당촌(塘村) 황위(黃暐 16051654)1653년에 정충록(㫌忠錄)을 편찬하여 진주에서 순국한 남원 출신 인사 황진과 고득뢰(高得賚), 그리고 금산 싸움에서 순국한 안영(安瑛)등 세 사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상기에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어영대장 서문중(徐文重16341709)1686년에 정충단비(㫌忠壇碑)를 세우게 되었고, 이민서(李敏敍16331688)는 여기에 비문을 지어 1차와 2차 싸움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도 했다. 그 후 진주성 전투로부터 200년이 지난 1794년에 서유본(徐有本17621822)진주순난제신전(晉州殉難諸臣傳)을 지어 진주에서 순국한 여러 다른 신하들의 전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덕분에 오늘날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엇고, 나아가 절의(節義)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모두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돌이켜 보는 계기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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