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비밀
1.
할매가 이 마을로 들어 온지 약 10년 정도가 지났을 때인 1975년 할매의 동생이 할매를 만나러 찾아 온 사실이 있다.
1975년은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월남이 공산화되므로서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남한도 충격에 빠져 정국이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고, 그런 와중에 그해 9월, 김대두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경기도 평택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약 20여명에 이르는 무고한 가족들을 연쇄 살인하는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던 때였다.

할매의 동생은 한 눈에도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음직한 50대 초반의 귀부인이었다.  바짝 마르고 헝컬어진 머리칼, 허름한 몸빼 바지만 입고 다니는 할매와 친자매지간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동생이 찾아 왔을 때 마침 할매는 산에 약초를 캐러 가고 없어 할매의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는데 그 사이 지서와 할매의 동생은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언니는 부산역 앞에서 한의원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유복한 가정의 큰딸로서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같은 고등학교 선생인 남편을 만나 혼인하였고, 혼인한 이듬해 남편은 남조선대학(지금의 동아대학교)이 설립되면서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이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언니는 첫아이를 임신하였으므로 아이 양육에 전념하기 위하여 학교를 그만 두었고, 딸과 아들을 낳아 부러울 것이 없는 가정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걸 다 주지는 않는다.
아니 하늘이 너무 행복한 언니의 가정에 시샘을 하였는지 1960년 한 순간의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두 앗아갔고,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언니는 미치광이가 되다 시피 하여 가족을 죽인 범인을 잡겠다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중에 범인이 경남 진주 인근에 사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진주 부근으로 왔다.

진주로 오기 전에도 언니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몸을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거지꼴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돈이 필요하면 동생인 자신에게 연락하여 돈을 좀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언니에게는 매월 일정한 수익이 창출되는 상가건물과 주택, 전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재산의 관리는 동생인 자신에게 맡기고, 돈이 필요할 때 마다 얼마씩 부쳐달라고 하여 그 돈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범인을 잡아 남편과 아이들을 죽이고 자기의 행복을 깬 만큼의 복수로서 범인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난 후에 자신도 남편과 아이들을 따라 갈 것이라는 말을 늘 반복하였다.
사고 후 형제나 친구들이 언니를 위로하고 설득하였지만 복수에 불타는 언니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광기의 눈으로 변하였으며, 누구의 설득이나 권유를 다 물리칠 만큼 집요하였다.
세상의 아무도 언니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고, 저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현실과 타협하면서 저절로 마음이 안정되겠지 하는 마음에서 그 때까지 내버려 두자는 형제들의 합의에 따라 언니가 해 달라는 대로 해 주고 있었다.
언니는 가족들이 모두 죽는 순간 자신도 이미 죽었고,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조차 괴로웠으나 오로지 복수를 하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생을 유지하였고, 극단적인 절제로 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만을 먹었다고 한다.
언니가 범인을 찾아 진주 인근으로 온 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산 역 앞에 있는 5층짜리 상가건물과 가족들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자신의 집, 그리고 역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까지 모두 처분하여 남편이 다니던 학교에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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