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본지 논설위원

박선호
박선호

요새(要塞)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를 생각하지만 마사다 요새는 네게브 사막 사해(死海)를 기준으로 해발 434m 길이 610m 320m 이지만 황석산성은 경남함양의 해발 1190m 둘레 2.9km로 세계 어느 나라의 산성보다도 더 훌륭한 자연요새다.

황석산성의 지형적인 특징은 북문에서 동문까지 한 덩어리의 급경사로 이루어진 화강암절벽이다. 그래서 일본의 지휘관들이 황석산성을 정찰 한 후 산은 높고 성은 견고하여 넘을 수도 없고 뚫을 수도 없었다.” 라고 했다. 4개의 접근로와 4개의문은 7만의 대군이 4개부대로 분산하지 않을 수 없고 남문의 양쪽 능선은 아랫마을 황산이나 우전 어느 마을에서 올라가든 남문 성벽 앞으로 붙지 않을 수가 없고 성벽 앞으로 들어 기는 순간 활의 즉사유효사거리 이내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교묘한 지형이다.

남문성벽 앞의 계곡은 아무리 많은 대병력이 올라와도 활의 유효사거리 50100m안에서는 한꺼번에 2000명 이상은 들어오기가 어려워 대군이 자동으로 분산되고 굴곡이 심한 남문성벽 앞의 골짜기는 조총을 쏘고는 뒤로 빠지는 조총의 전술사격대형을 취하기도, 사격자세를 취하기도 어려운 요새다.

 

또한 활은 발사속도가 23초면 충분하나 조총은 한발을 쏘는데 1분이나 걸린다. 따라서 발사속도에 있어서 2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백성군은 사수가 100명이면 분당 2000발이니 일본군 2천명과 같은 화력이 되고 200명이면 4천발이고 500명이면 분당 1만발이니 발사속도에서 일본군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다. 백성군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는 전투에 남녀 구분 없이 참여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남원성 전투를 보라!> 군인만 기록했지 참전한 백성들은 기록이 없다. 평야지대이고 근접전투라서 백성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석산성은 일본군은 상향사격이고 백성군은 하향사격이니 일본군은 속절없이 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약자나 부녀자 농민군도 죽음을 각오하면 열배도 넘는 일본정규군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전투다. 그래서 일본군은 5일간의 전투 중, 문이 열리는 18일 새벽까지는 한 명도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러한 지형적 이점을 잘 활용한 군무장 유명개, 곽준, 조종도 현감의 지혜가 잘 발휘된 곳이 황석산성 대첩이다. 또한 임금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國君死社稷)이요, 대부는 자신의 직분을 위하여 죽고(大夫死官守), 백성은 가족을 위하여 죽는다(百姓死家族), 라는 <황석산정신>이 위기의 나라를 구한 것이다.

따라서 15924<유명개가 격문(檄文)을 발하는 날부터> 1597년까지 6년간 전투준비를 했고 8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의 전투에서 백성군은 예상치 못한 대군에 준비한 화살의 부족으로 <백사림성주가 도망을 가는 원인>을 제공하였고 마치 아래에서 받치고 위에서 내리찍는 <망치 모루작전>같이 완벽하게 포위된 채 전개된 구로다 군의 진압에 818일 새벽, 성을 넘어 탈출을 한 백성군은 성 밖에 있던 일본군에게 코를 베이고는 수천 명 모두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 75,300명중 27,000명을 살려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석산성대첩은 본격적으로 코를 베는 <코베기 전투>. 전장에서 돈을 벌겠다고 일본군이 동료들의 코를 벰으로써 스스로 궤멸되는 원인이 되었다.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 5만 여명이 밴 코가 3,726개인데 황석산성을 공격한 장군들이 낸 보고서에는 남문에서 안음사람들과 싸웠던 모리데루모도의 집사 깃가와는 18,350, 10,040, 조오소가베 6,040, 북동문에서 거창사람들과 싸웠던 구로다가 3,000, 서문에서 함양사람들과 싸웠던 나베시마가 3,369개의 <코베기보고서>가 있다.

남원성과 비교하여 열배도 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황석산의 일본군은 조선인이나 일본군 구분 없이 코를 베는데 대단한 집착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에비(殪鼻)는 코를 베이고 전사를 했거나 얼굴가운데 두 개의 콧구멍이 들어나고도 살아난 사람을 에비라고 부른다. 정유전쟁 이후 수 십 년간 코를 베이고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무섭다, 또는 만지지 말라, 금지시키는 말로 에비! 에비! 에비 온다. 에비!” 라는 말이 생겼다. 황석산성전투에서 7년 임진전쟁 중 최대의 일본지상군의 궤멸은 전라도를 통치할 남원성을 공격한 우기다의 좌군을 전주성에서 <양동북진(陽動北進)>을 강요함으로써, 북진하는 8.28일부터 정읍으로 돌아오는 9.16일까지 20여 일간 전라남도를 군사적 무주공산으로 만들어 이순신장군이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명량대첩의 준비가 가능토록 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황석산성 전투패배에 대한 역사적인 복수로 300년이 지난 191431일 황석산성이 위치한 안의군(安義郡)을 파군(破郡)하여 <황석산성 대첩의 흔적지우기>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다. [다음호 계속]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