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平壤, 南晉州( The Pyeong in the north, The Jinju in the south)"의 의미는 옛부터 平壤妓生과 晉州妓生이 타 지역의 기생들 보다는 절조관념(節操觀念)이 매우 강함을 상징하는 일종의 故事成語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현 진주성 촉석루 서쪽에 위치한 의기사(義妓祠) 현판의 양쪽에 걸려있는 황현(黃玹)과 산홍(山紅)의 두 詩文을 중심으로, 義妓 논개와 산홍의 義節과 忠節 정신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논개의 충절행장(忠節行狀)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기록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義妓祠記이다. 그 기문의 내용을 우선 살피기로 한다.

昔日酋之陷晉州也. 有妓義娘者 引日酋對舞於江中之石 舞方合抱之投淵而死 此其祠也. 嗟呼 豈不烈烈賢婦人哉. 今夫一酋之殲 不足雪三士之恥 雖然 城之方陷也. 隣藩擁兵而不救 朝廷忌功而樂敗 使金湯之固 失之窮寇之手 忠臣志士之忿欲恚恨 未有甚於形投者矣, 而眇少一女子 能殲敵酋以報國 君臣之義 曒然於天壞之間 而一城之敗不足恤 豈不快歲.

< 옛날에 왜적의 우두머리가 진주를 공격하여 진주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의로운 기생 한 낭자가 있었다. 이 기생은 일본 장수를 인도하여 강 가운데 있는 돌에 가서 껴안고 춤을 추다가 그 장수를 안고 물에 빠져 죽어서 순국(殉國)하였다. 이 사당은 그 의로운 기생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 슬프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열부(烈婦)이니 어찌 현숙(賢淑)한 부인이 아닐 소냐? 바야흐로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 버렸으니 삼장사(三壯士)의 치욕을 앙갚음함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도다. 비록 성이 함락되려 하는데도 이웃 병영에서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도와 주려하지 않았다. 또 나라에서도 그런 기특한 공을 기리려하지 않고 오히려 꺼려하였으니, 전쟁에 지고 말았다. 이렇게 튼튼한 성을 적에게 빼앗겨 잃고 말았으니 충신과 신하들의 분노와 한스러움은 매우 심하여 형용할 수도 없도다. 그렇게도 아름답고 젊은 한 여자가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서 나라에 보답하였으니,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천지간에 밝게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논개는 여염집 아낙이 아니라 기생이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야 할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음을 택했으니 그 결단(決斷)이 대단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서 자결한 것이 아니고 적장과 함께 죽었으니,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전세를 뒤지거나 만족할 만한 보복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자결과도 그 맥을 같이할 것이다. 왜냐하면, 1910년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황현은, 자신은 비록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아무런 의리도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팔도에 빼앗긴 나라의 그 울분(鬱憤)을 못이겨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기꺼이 독약을 마셔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결국 그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가 그 누구도 감히 실행할 수도 없는 거룩한 애국 행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황현이 일찍부터 논개에 관한 시문(詩文)을 지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였으며,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의 이 기문이 현재 촉석루 옆의 의기사(義妓祠)의 마루에 걸려 있다.

의기사 현판 오른 쪽에는 황현의 칠언시(七言詩) 한 수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걸려 있기도 하다.

 

楓川渡口水猶香 : 풍천 나루 어구는 물도 향기로워서

濯我須眉拜義娘 : 내 얼굴 씻고서 의랑에게 인사하네.

蕙質何由能殺賊 : 고운 몸으로 어찌 적을 죽일 수 있었나

藁砧已自使編行 : 낭군이 이미 항오(行伍)에 편입시켜서라네.

長溪父老誇鄕産 : 장계의 노인들은 제 고향 출신임을 자랑하고

矗石丹靑祭國殤 : 진주에선 영정 그려 순국의 혼을 제사하네.

追想穆陵人物盛 : 생각하면 선조 때 인물 많이 났는데

千秋妓籍一輝光 : 기적(妓籍)의 한 줄기 빛도 천추에 전해지네.

 

의기사에 걸린 시판에는 이 시의 제목을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라고 하였다. 의기사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황현이 읊었다는 말이다. 이 작품이 매천집(梅泉集)에는 <의기논개비(義妓論介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에서 말하는 비석은 1864년에 장수현감 정주석(鄭冑錫)이 논개의 생가터에 세운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命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그곳에는 시에서 말하는 풍천 나무가 없다. 한편 영남문학회에서 발행한 촉석루지풍천모범(楓川暮帆)’진주십경(晉州十景)’중 하나로 소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풍천은 촉석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남강의 별칭일 것으로 추정된다. 풍천이 남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시의 원래 제목 <의기논개비>는 의암 바로 위쪽 벼랑 아래에 세워진 <의암사적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기사 현판 왼쪽에는 진주 기생 산홍(山紅)의 시가 걸려 있다. 이 시 역시 제목은 <義妓祠感吟>으로 되어 있다. 그 시문은 다음 호에서 논개에 대해서 읊은 시문과 동일 제목인 <의기사감음>의 시와 함께 비교해 보기로 하겠다.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