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거란(요나라) 1,2,3차전쟁의 진주인 3대장군은 하공진 장군(충절공)강민첨 장군(은열공)정신열 장군(은렬공)을 들 수 있다.

 

진주인 3대 장군은 진주의 3대 성씨(강씨하씨정씨)의 시조로 진주성내 경절사 하공진 장군(하씨), 청계서원 정신열 장군(정씨), 옥봉동 은열사 강민첨 장군(강씨)을 배향하고 있다.

요전쟁은 993(성종 12)부터 1019(현종 10)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3차례에 걸친 거란(요나라)의 고려 침략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본지는 진주인 3대 장군의 여요침입 시 활약상을 조명하기 위하여 본지 편집국은 기획 보도를 구성하였다.

 

하공진(河拱辰) 장군(진주 하씨)은 누구인가?

나는 고려인이다 어찌 두 마음을 먹겠는가

○ 현종 2년(1011년) 송 대중상부 4년ㆍ거란 통화 29년
정월 초하루 을해일에 
거란주가 개경에 들어와서 태묘와 궁궐ㆍ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타버렸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머물렀는데 두 왕후가 간 곳을 잃어 채문에게 가서 찾게 하였다. 요탄역(饒呑驛)에 이르러서야 만나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서 왕후를 위하여 3일 동안 머물렀다.
○ 정축일 (1/3)에 하공진. 고영기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공진 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시랑 충숙과 장연우ㆍ충순ㆍ주저ㆍ유종ㆍ김응인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무인일 (1/4)에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뇌驛에서 머물렀다. 
○ 기묘일 (1/5)에 왕이 陽城 (경기 安城郡)으로 행차하였다. 날이 샐녘에 고을의 아전[吏]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天安府(충남 천안)에 이르니 유종과 응인 등이 드디어 도망하였다.
○ 을유일 (1/11)에 거란 군사가 물러갔다.○ 정해일 (1/13)에 왕이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에 들어갔다.○ 경인일 (1/16) 밤에 적정을 염탐하는 사람이 거란 군사가 이르렀다고 잘못 보고하니, 왕이 크게 놀라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채문이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밤에 나가시면 백성이 놀라 요란할 것이니 행궁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이 염탐해 알아본 후에 행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채문이 나가서 살펴보니 통사사인(通事舍人) 송균언과 별장(別將) 정열이 거란의 전봉(前鋒)인 원수(元帥) 부마(駙馬)의 서신과 하공진의 주장(奏狀)을 가지고 왔다. 
채문이 그들을 데리고 행궁으로 나아가니, 왕이 하공진의 주장을 보고는 거란 군사가 벌써 물러간 것을 알고 기뻐하며 송균언을 도병마녹사로, 정열을 친종낭장(親從郞將)으로 삼았다. 
거란 부마의 서신은 거란 문자로 썼는데 해독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 2월 정미일 (2/4)에 왕이 전주를 출발하여 무신일에 공주에 머물러 6일을 지냈는데 절도사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쳤다. 그로 인하여 그를 맞아들이니 곧 원성왕후이다.-양규에게 공부상서를, 김숙흥에게 장군(將軍)을 증직하였다.-중랑장 지채문에게 전지 30결을 내려주었는데, 교하기를, “짐이 적을 피하여 먼 길에 낭패를 당했는데 따라온 신하중에 도망해 흩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채문만이 풍상을 무릅쓰고 산천을 지나며 말고삐를 잡는 노고를 아끼지 않고 끝내 송죽같은 절개를 보전하였소. 진실로 남다른 공이 많으니 어찌 특별한 은전을 아끼리오." 하였다.
○ 정묘일 (2/24)에 개경으로 돌아와서 수창궁(壽昌宮)에 거처하였다.
○ 여름 4월에 공부 낭중 왕첨을 거란에 보내어 군사를 돌이킨 데 대해 사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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