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유명 3대 누각 중에 하나였던 진주 촉석루는 그 긴 세월 만큼 숱한 역경과 수난을 겪은 슬픈 문화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다른 어느 누각 보다 처절한 아픔의 사연을 담고 있는 바, 세 차례의 소실(燒失), 두 차레의 중건(重建), 열 차례의 보수(補修), 말하자면 국보급 문화재에서 오랜 기간 문화재 등급상 최하위인 도문화재자료로 추락되어 있다가, 2년전에 도유형문화재로 겨우 승급한 말그대로 파란만장한 상처 투성이의 누각이지만, 오늘도 천겁(千劫)의 남강 변에서 망경산(望京山)을 마주하면서 지난 날의 죽음같은 역사를 잊은 듯, 우람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있음이 우리 진주인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이며 문화적 긍지의 상징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본호에서는 현존의 촉석루가 여전히 보존하고있는 건축상의 예술성과 그 역사에 대해서 기술해 보고자 한다. 우선 촉석루에 올라가 보면, 세 개의 계단 중 가운데 돌계단을 올라 중간에서 담 너머로 보았던 촉석루 현판을 다시 한번 올려다 보게된다. 이 현판은 조선조 명필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필적이다. 조윤형의 자는 치행(穉行)이고, 호는 송하옹(松下翁)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벼슬은 호조참의에 이르고 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돌계단 위에서 신발을 벗고 다시 나무계단을 올라 마루에 들어선다. 복잡한 구조에 단청이 고운 천정을 한 번 둘러 보지만 건축에 문외한 사람들은 뭔가를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혹시 고건축 전문가에게서 촉석루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아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정면 5, 측면 4, 민흘림기둥에 주심포 형식이라는 말까지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천장이 연등천장이고, 서까래는 개판으로 막음을 하였으며, 좌우 툇간에만 작은 우물 반자를 설치했다는 말은 얼른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구나 구조는 7량가(七梁架)로 기둥 위에 대들보, 중종보, 종보 등을 걸어 들보가 세 줄로 층을 이루고, 창방과 주심도리, 장혀 사이에 화반을 설치하였으며, 기본적으로 모로단청이지만 계풍에 별지화를 풍부하게 베풀어서 비교적 화려하다는 설명에 이르면 이해에 한계를 느낀다. 다만 규모가 큰 다른 건축물은 대체로 대들보를 건물 안쪽의 높은 기둥 위에 걸쳐 일단락을 하고, 그 바깥은 툇보를 거는 데 반해, 촉석루는 건물 맨 앞쪽 기둥에서 맨 뒤쪽 기둥까지를 하나의 대들보로 짜 맞춘 것이 중요한 특징이라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한하다.

이런 구조는 한국 전쟁 때 소실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대들보로 육송이 아니라 전나무를 사용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긴 육송은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촉석루의 대들보로는 1956년에 강원도 설악산에서 채취한 272년생 전나무가 사용되었다. 이 나무의 운반에는 육군 제3사단 소속 군인들이 동원되었는데, 나무가 너무 길어 군용 트럭이 굽은 길을 지날 때 가옥 담장 수십곳을 허물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가능하면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서 난간으로 다가가 시원한 강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잠시 조망을 해 본다. 오른쪽으로 멀리 진양호를 막 벗어난 물줄기가 햇볕에 반짝이고 있고, 왼쪽으로는 진주교 너머로 뒤벼리의 절벽이 강물 줄기를 막아선다. 진주교 상판 아래쪽으로 교각이 있는 곳마다 두 개씩의 금빛 둥근 고리 모양의 장식이 조그맣게 보인다. 이것은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 때 손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미리 끼워두었다는 가락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남강은 경호강과 덕천강이 진양호에서 합류하여 시작되고, 창녕군 남지읍에서 낙동강을 만나 더 큰 강물이 된다. 경호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것이고, 덕천강은 지리산에서 발원한 것이니,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도 매우 양호하다. 기실 진양호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금새 바다로 들어갈 길을 찾을 수 있을 만도 한데, 남강 물은 옆으로 옆으로 흘러 낙동강을 만나 부산에 이르러서야 바다로 들어간다. 이른바 낙남정맥(落南正脈) 때문이다.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김해 분성산에 이르는 산줄기를 가리키는데, 낙동강 남쪽에 있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가장 높은 산이 기껏해야 800m 정도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 나지막한 산과 구릉으로 되어 있다. 길이는 200km에 이르는데, 낮은 곳은 산맥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인 곳이 많다. 그러나 이 산줄기는 우리나라 13개 정맥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강의 유역을 가르는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남강에서는 매년 가을이 되면 유등 축제가 열린다. 유등(流燈)은 등불을 흘려보낸다는 의미인데, 그 정확한 유래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진주성 안의 군사와 성 밖의 의병 등 지원군과의 군사 신호의 일환으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고, 남강에 등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였던 것이 그 유래라고 하지만,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후일 진주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에 몸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유등을 띄웠다고 하며, 이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진주남강유등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후자의 설명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촉석루의 건축상의 특징과 남강과 관련된 촉석루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다음 호에서는 촉석루와 인접해 있는 다른 문화재들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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