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진주성 내의 촉석루(矗石樓)에 대한 지금까지 진주의 일부 선대인들이나 후대인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거나, 심지어 그들의 독선으로 지극히 와전(訛傳)되었던 적지않은 기록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나름대로 신선하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史實)들을 관련 문헌(文獻)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진주성내의 촉석루와 연관이 있는 네 개의 장대(將臺), 즉 남장대(南將臺), 서장대(西將臺), 북장대(北將臺) 그리고 동장대(東將臺)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피기로 한다.⌟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어 다시 촉석루 내부를 둘러보면, 제일 먼저 정면 중앙에 나지막이 자리 잡고 있는 남장대 현판이 첫눈에 들어온다. 진주에서 활동한 서예가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19092001)가 쓴 것이다. 그다지 세련된 필획은 아니지만, 마치 장미가 장팔사모(丈八蛇矛)를 꼿꼿이 세우고 서 있는 듯 힘찬 모습이다. 촉석루가 그저 바람을 쐬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풍류 공간이라 생각하고 올랐다가도, 이 남장대 현판을 보면 문득 전투 지휘에 여념이 없는 장수의 모습이 떠올라 숙연해지곤 한다. 장대는 전쟁할 때 장수가 지휘를 하는 곳이다. 진주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장대가 있었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이기도 하다. 현재는 남장대를 비롯해서 서장대(西將臺)와 북장대(北將臺)가 남아 있다. 남장대는 장대 중에 제일 규모가 커서 전투 지휘의 본부가 되었다. 서장대와 북장대의 현판도 역시 정명수의 필적인데, 세 글씨는 결구는 비슷하지만 필획은 약간 차이가 있다. 특히 서장대 현판은 마치 장수가 긴장을 약간 풀고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장대는 지금은 정자처럼 되어 있지만 원래는 남장대와 같은 다락집 이었다. 여지도서에는 회룡루(回龍樓)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건물은 1934년에 진주의 독지가 서상필(徐相弼 18921955)씨가 단독으로 출자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진남루(鎭南樓), 혹은 공북루(拱北樓)라고도 불렀던 북장대는 공북문는 공북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문루를 지나 다시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진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기에 건축되었던 것이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고, 1618년에 병사 남이홍이 촉석루를 중건하면서 함께 중건하였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끝으로 동장대는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데, 1911년 어느 날 밤중에 무너져 버렷다고 전해지고 있다. 본래의 위치는 진주대로 동편 어느 지점으로 추정이 되는데, 진주성의 외성이 모두 발굴되고 나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장대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 속에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다음은 특히 촉석루의 이칭(異稱)이기도 한 남장대 내에 걸려있는 여러 시() 현판에 대해서 기술해 본다면, 남장대는 원래 경관도 좋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누각이기 때문에 남장대에 오르면 그 누구라도 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그려내고 싶고,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회포를 펼쳐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글을 하는 옛 선비가 이 곳 남장대에 올라 어찌 시 한 수 없을 수가 있겠는가? 이 남장대에서 수많은 시가 지어졌겟지만, 후대인들은 그중에 의미 있는 작품을 골라 누각 곳곳을 꾸몄다. 그렇게 해서 문인 묵객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감회를 공유하고 이곳 남장대(촉석루)에서 정신적으로 교유를 이어갔다. 다음 호에서는 현재까지 남장대에 걸려있는 선대의 훌륭했던 선비이자 명현들의 시문(詩文)들을 <촉석루의 현판>이라는 주제로 작가들의 행장은 물론, 각 작품들을 원문과 함께 감상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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