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맑은 물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다. 만나면 그의 진정한 마음과 움직임의 이유를 알고 싶다. 하지만, 물은 말이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보고 느끼라는 뜻인데 내가 가진 것은 비좁고 작은 머리와 생각이라 왜 낮은 곳으로, 막히면 둘러가고 가르면 크거나 작게, 아니 국수발처럼 가는 물줄기로 흐르는가를. 심지어는 흐르다가 뜨거운 햇살 만나면 하늘로 날아오르기까지 하는 변장술도 부릴 줄 아는 ‘물’임에도, 위로 오를 줄을 모르고 오직 주위의 환경대로 흐르거나 스미며 함께하는 수줍은 삶만 고집하는 그 깊은 마음을 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스며들고 젖어 안는 것까지. 눈에 보이는 그의 끝은 구름과 바다니 그저 그 모습이 좋아 지켜만 보고 산다.

이제, 나는 나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나이가 들수록 커지니 이것이 자유고 이것이 행복이련가. 그런데 나는 나대 론데 우리는 ‘우리’가 아니니 이를 어쩐담? 제약과 구속이 많아 거추장스럽고 반론과 이견이 많아 혼란스러운 삶. 얼마나 편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라고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꾸릴 것이라고 그리도 아등바등 인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인 듯. 아니, 이것이 곧 삶의 기본 자산이요 자재요 소재란 말인가. 막으면 편하고 덜한 위험인데 막히면 왜 그리도 답답한가. 모으고 쌓으면 푸근하고 넉넉해지는데, 왜? 비고 없어지면 허전하고 배고프고 쓸쓸하며 아프고 괴로운가. 물은 그리도 마음이 넓은지 알 수가 없다. 무엇이든 어떤 물질이고 색깔이든 받아들이기에 말이다. 참 닮고 싶지만 닮을 수 없다.

아기씨가 담긴 몸이 다르고. 보고 듣고 깨달은 머리와 가슴이 달라 발휘하는 능력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가는 터가 같고 물(物)이 동물이나 미물이 아닌 같은 인물(人物)임에도 통하고 합해지지 못하는 까닭은 기어이 혼자이고 싶기 때문인가. 문득 한가롭고 싶은 날, 산바람이 시원하고 향기롭게 느껴지는 때이면 누구를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이 없어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할까. 
 날씨가 좋아 들길을 걷다 보니 수로 옆 작은 은거지에 붙은 나무그루터기 밑에 쪼그려 앉은 개구리와 눈을 마주 한다. 어쩐지 평소에 보던 윤기 있고 활기 넘치는 본 모습을 잃은 것 같고 우울해 보인다. 더러운 환경 탓에 알 낳을 장소가 마땅찮은지 아니면 겨울잠 깬 이후 그립던 짝을 찾지 못했는지 껌벅껌벅 눈만 껌벅이며 달아 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도 같이 착잡한 맘이 든다. 아무리 높고 크고 많고 넓게 무겁게 살고 싶을지라도 혼자서는 그럴 수 없다.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을 함께 하고 싶다면 동물도 식물도 미물도 인물과 같이 살자는 통 큰 마음을 찾고 키워 안고 베풀며 사는 것이 바른 생활이 아닌가 한다. 해질 무렵 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춤 굿이 벌어진다. 나는 그들의 생이 끝나는 마지막 춤마당을 돌고 돌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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