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문주본지 논설위원
시인 조문주본지 논설위원

 

“집에서 학교 오는 길에 본 것들을 말해볼래요?”
아이들에게 물으면 사는 곳에 따라 다양한 답이 나온다. 대부분 문구점과 PC방, 피자집, 애견샵 등을 말한다. 학부모들은 마트나 미용실, 방앗간 등을 말한다.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어요?”
같은 아파트나 같은 집에 살아도 학부모가 본 것과 아이들이 본 것이 조금씩 다르다. 서로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 오고 가는 길에 본 것들을 알아보는 과제를 내 주었다. 같은 길을 갔는데도 서로 본 것이 많이 다르다는 걸 확인하며 놀라곤 한다. 
주의 집중에 대한 설명을 위해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실험한 ‘무주의 맹시’영상을 보여준다. 흰 옷을 입은 여성이 농구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를 알아보는 활동이다. 농구공에 집중한 나머지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분여의 영상이 끝나고 나서 고릴라를 보았는지를 묻는다. 상황에 따라 아이들 반 정도는 못 보았다고 하는 편이다. 농구공 패스하는 횟수를 헤아리느라 고릴라가 나타난 것을 모르는 수가 많은 것이다. 이 영상이 많이 알려져 있기에 고릴라를 발견하기는 하지만 다른 것이 바뀐 건 잘 찾지 못한다. 커튼 색깔이 바뀌고 한 사람이 나가고 벽의 글자가 바뀐 것 등은 거의 찾지 못한다. ‘주의를 다른 곳에 두고 있을 때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무주의 맹시’원리인 것이다.
수직과 평행에 대해서 예로 들어가며 열심히 설명 했다. 모두가 다 이해를 했다고 대답하기에 수업을 마친다. 다음 시간 평가결과를 보면 교사는 놀란다. 아이들 중 몇 명은 아예 틀린 답을 찍으며 난감해한다. 같은 시간에 같이 공부한 아이들에게 개념형성이 안 된 것이다. 교사는 잘못 가르쳐서 그런가 싶은 자괴감마저 들고 허탈하기까지 하다. 이는 수업기술의 문제이기 보다 개인 심리 작용이다. 주의가 분산되어 집중하여 듣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들었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보았다고 다 본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실제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눈앞에 보고도 보지 못했다는 사례가 종종 있다.  
“난 그 아이를 절대로 보지 못했어요.”
축구공을 줍느라 찻길에 뛰어드는 아이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가? 공에 집중하느라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운전자도 아이를 미처 보지 못했다. 통화에 집중하느라 고릴라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내게 되는 것이다. 장난하느라 친구를 밀쳤는데 찻길로 넘어지는 아이가 있고 저편의 엄마를 보느라 신호를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는 아이도 있다. 생명과 관련된 안전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고릴라가 나올 수 있다고 주의해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감을 통해서 들어온 모든 정보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마음의 필터작용에 따라 ‘생략’하는 정보들이 많음을 인지해야한다. 집중하다보니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친구가 놀리며 딴 짓으로 마음을 흔들어 놓아도 그걸 제어하고 공부에 집중하는 아이를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잘 조절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미스터 트롯의 가수 노래를 그냥 웃고 넘길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인정하는 유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다. 고릴라를 의식하고 안 하고의 마음조절기능 버튼을 잘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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