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거란(요) 1,2,3차 전쟁 진주인 3대 장군의 활약상

고려와 거란(요나라) 1,2,3차 전쟁의 진주인 3대 장군은 강민첨 장군 하공진 장군 정신열 장군을 들 수 있다.

 

진주인 3대 장군은 진주의 3대 성씨(강씨하씨정씨)의 시조로 은열사 강민첨 장군(강씨), 진주성내 경절사 하공진 장군(하씨), 청계서원 정신열 장군(정씨), 을 배향하고 있다.

요전쟁은 993(성종 12)부터 1019(현종 10)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3차례에 걸친 거란(요나라)의 고려 침략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본지는 진주인 3대 장군의 여요 침입 시 활약상을 조명하기 위하여 본지 편집국은 기획 보도를 구성하였다.

하공진(河拱辰) 장군은 누구인가?

아시고려인 불감유이심 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

나는 고려인으로서 감히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하공진 장군은 고려 8대왕 현종조 때에 거란군 40만 대군이 침입하여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을 때 나라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 외교담판으로 이역만리 타국 거란 땅에 볼모로 잡혀가 순절(심간을 씹히는 충열의 죽음)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있었으면서도 하공진은아시고려인 불감유이심 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나는 고려인으로서 감히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거란 성종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순절의 길을 택하였다.

고려예종(高麗睿宗) 때 그의 영웅적이고 충성스러운 일대기가 하공진 놀이로 창작되어 국가적인 행사 때 연극으로 공연된 바가 있었다. 조선 숙종 때 김진재 화가(畫家)가 그린 진주성도병풍 중에 공진당이 소재한 곳 이라고 명시되어있다.

 

하공진은 진주성지 내 공진당에서 태어났다. 즉 태지이다 또한 진주인으로서 청사에 최초로 등재된 인물이다. 또한 진주양, 진주시지 인물 편에 첫 번째 수록되어있다. 고려통일대전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또한 국가에서 시조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기린각에 화상을 그려 추모하게 하였으며, 충절신 하공진 장군으로 부터 강민첨 장군, 조선 초기 북방개척의 선구자이신 양정공 하경복장군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제1차 진주성전투의 충무공 김시민장군과 7만 민··군의 살신보국 정신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가 잇다.

이로 인해서 진주를 충절의 고장이라고 하는 효시가 하공진 장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진주인은 알아야 하며 진주시는 하공진 장군을 널리 현창해야 하고 충절신 사당이 진주성내 사적지에 존재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조선건국 후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문충공 하륜 영의정과 북방개척의 선구자이신 양정공 하경복장군 등의 역할을 볼 때 진주가 왜 충절의 고장이라고 일컫게 된 효시가 하공진장군으로부터 시작되어 임진왜란 진주성 1차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또한 진주성 2차전투에서 7만 명의 민관군이 합심 진주성에서 결사 항전하여 순절한 진충보국 정신은 하공진장군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을 통하여 알 수 가 있다.

[제공: 진양하씨대종회 사무국장 하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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