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육군 소장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라를 부흥시킨 산업혁명영웅이였다.
1973년은 1차 오일 쇼크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이 멈췄던 해이다.
승승장구하던 미국, 일본, 유럽에서는 1973년을 기점으로 성장률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기업들은 1973년을 기점으로 계열사가 늘어나기 시작 경제가 활성화되는 동력이 생겨났다.
그 이유는 1972년 8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사채동결조치" 에 따라 기업체에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믿기진 않겠지만 지금 대한민국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삼성, 현대, LG 같은 30대기업도 그 당시엔 모두 사채 빚에 허덕이며 날마다 부도를 걱정하면서 회사를 운영 해야 했다.
사채시장 난립으로 인해 은행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국민들은 저축 할 여유가 없었으니 은행에 돈이 있을리 없었다.
대부분의 돈은 사채업자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하려면 이들에게 고래채돈을 빌리지 않고서는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엔 사채에 대한 규제도 없었으니 이자는 매우 비쌌고, 기업이 열심히 일해서 이윤을 남겨봐야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꼴이되고 있었다. 
사채업자들은 조직폭력배와 유력 정치인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대한민국 자본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 기업체는 사채업자들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김영삼, 김대중의 40대 기수론이 부각되면서 양김시대가 전개되므로서 여당과 야당간에 투쟁은 말할수 없이 극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전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기업활성화를 위해 사채 빚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선견지명의 판단에서1972년 8월 3일 전격적인 사채동결조치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이는 기업들이 사채업자에게 빚을 졌던 계약관계를모두 무효"로 만든 특별조치를 과감하게 취한것이였다.
이러한 조치는 분명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조치로 사채업자들의 권리를 빼앗은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사채 빚 때문에 기업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도위기 속에 살아야했던 기업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양 김씨의 야당과 일부 언론은 독재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맹비난했고, 사채업자들의 저항 또한 극심했던것도 사실이다.
그들과 연결된 정치인, 조직폭력배가 같이 합세하여 대한민국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혼돈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972년 10월 유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17일 국회해산 및 헌법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1972년 12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91.5%의 지지로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유신시대를 전개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지하에 숨어 있던 돈은 은행으로 몰려들었고, 기업들의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은 1971년 39억원에서 1973년 545억원으로 급증했으며, 1973년 1분기 GNP 성장률은 단 1년만에 전년 대비 19% 상승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새마을운동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국가부흥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채업자들에게 은행에 돈을 넣고 기업에 투자하면 돈의 출처를 묻지 않을 것이며 세금도 감면해줄 것이라고 했고, 기업들에게는 최대한 더 많은 자회사를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면 세금 혜택을 주는 방법으로 경제 활성화를 이끌어가는 정책을 펼쳤다.
그때 구성된 것이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끈 30대 그룹이 탄생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경제의 꽃은 이렇게 피기 시작하여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보다 못살았던 이 나라는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고, 산업혁명에 의한 세계경제대국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경제는 발전시켰지만, 독재는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은 맞지만 나라를 바로 세울수 있는 독재가 아니었다면, 사채업자들을 막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하여 사회를 과감하게 혁신하였고 그로 인해 피를 흘렸으나 결과적으로는 경제부흥의 기반을 닦은 것은 사실이며 그 기반속에 오늘날의 경제강국이 이루어져 국민 모두가 북한보다 45배 잘 살고 있다는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그는 사채동결, 유신독재와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기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서는 모든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라의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는 절박감속에 과단성있게 결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수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부국강병의 대한민국을 바로 세운 것은 사실인데도 박정희대통령일가는 비운의 운명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빨갱이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지고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총탄에 쓰러지며 박근혜대통령은 영어의 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무슨 운명이 이런운명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눈물겹지 않을수 없다.
한가문의 부모자식이 처참하게된 가운데에서도 오직 나라발전만을 생각하고 노심초사 해왔기때문에 박정희육군소장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부흥을 위한 산업혁명가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 이루어낸 경제발전은 한강의 기적도 아니다.
오직 소수의 천재들이 있었고, 그들을 지휘한 통치자가 있었으며 '박정희'라는 천재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기적 같은 부국강병을 이끌어낼수 있었다고 할수있다.
지난 세월의 뼈저린아픔과 슬픔 초근목피와 보릿고개를생각하면 박정희라는 산업혁명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수 있었겠는지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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