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북향의 계단으로 누각의 경내로 올라서면, 우선 정면 남쪽으로 건너편에 망경동의 대숲과 남강 변이 보인다. 다시 고개를 들고 촉석루의 처마를 보면 뜻밖에 전국 어느 유명 누각들 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현판들이 촉석루 경내의 구석 구석에, 그것도 그 옛날의 전국적인 명현들이 남긴 한시(漢詩) 작품들이 지금까지도 십 여편 이상이 선명한 시판(詩板)으로 걸려있다. 이들 시판의 내용 속에는 “진주의 연원(淵源)과 진주의 슬픈 역사, 진주의 인물론, 그리고 끝으로 진주정신(晉州精神)”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이 현판들의 작품 내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음이 더욱 안타깝기도 하다.

그리하여 본보에서는 지난 12호부터 소위 촉석루 현판의 한시들의 내용을 작가들의 행장(行狀)과 함께 비교적 쉽고 자세하게 풀이해 왔다. 지난 12, 13호 에서는 고려 말의 충목왕(忠穆王) 원년(1345)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까지 오른 정을보(鄭乙輔)의 작품과 조선조 세종때 영의정을 역임했던 하연(1376∼1453)의 작품을 풀이하고 감상했다. 이어 본 호에서는 태계(台溪) 하진(河溍)의 칠언율시를 감상하고자 한다.

 

 

滿目兵塵暗九區-전쟁 여파 눈에 가득 온 세상이 어두운데

一聲長笛獨憑樓-긴 피리 한 소리에 호로 다락 기대었네

孤城返照紅將斂-외딴 성에 낙조는 붉은 빛을 거두고

根市靑嵐翠欲浮-저자엔 맑은 이내 푸른 기운 띄웠네

富貴百年雲北去-평생의 부귀영화 구름처럼 떠가고

廢興千古水東流-천고의 흥폐는 물과 같이 흘러가네

當時冠蓋今蕭索-당시의 고관대작 이제는 적막한데

誰道人材半在州-그 누가 인재의 반이진주에 있다던가.

 

상기 시의 원제는 등촉석루유감(登矗石樓有感)이다. 촉석루에 오르니 느껴지는 감회가 있어서 지었다는 뜻이다. 하진은 촉석루에 걸린 시의 작자들 가운데 가장 후배가 되는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하진은 1633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司宰監) 직장에 임명되었으나 노친의 봉양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에 이르렀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병조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사임하였다. 효종이 즉위한 후 다시 지평이 되어 김자점(金自點)의 전횡을 논핵(論劾)한 후 사임하고는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하진은 임란을 겪은 후에도 나라가 그다지 힘을 떨치지 못한 것에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촉석루도 임진왜란에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10(1618)에 중수한 것이어서 하진의 감회는 더욱 특별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때에 진주에서 더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조정에 힘이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되지 못하였으니 더욱 안타깝다. 하진은 진주 근처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시를 지었다. 집현산, 청곡사, 응석사 등이 모두 그의 시작(詩作) 무대였던 것이다. 그는 이 지방 사람으로서 남다른 애향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하진의 시현판의 바로 우측에는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13471434)의 시가 걸려 있다. 정이오 는 자가 수가(粹可)이고 우곡(愚谷)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진주이며, 맨 처음(지난 12) 기술했던 시 현판의 작자인 정을보의 증손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야은 길재와는 친구 사이 이기도 했다.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다. 진주에서 봉직한 적은 없는 것 같으나, 진주 향교에서 가르친 적은 있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은 다음 호에서 촉석루 현판에 걸려있는 작품 한 편과 현판에 걸려있지 않은 또 다른 작품 한편을 더 소개하기로 한다.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