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 추석 명절을 코앞에 두고 전통시장 나들이를 했다. 평소답지 않게 북적북적해 대목을 실감했다. 상인들이 손님을 부르고,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괜스레 마음이 달뜬다. 그야말로 삶의 합창이 연주되는 곳 아닌가. 생선가게, 채소가게를 거쳐 지났다. 이윽고 연어 귀소 본능처럼 떡집 앞에 발길이 멈췄다. 찜기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떡집 안에 자욱하다. 참 묘한 일이다. 코흘리개 시절 입력된 떡 맛이 가끔 그리울 줄이야. 요즘 추석 차례상에 오르는 송편은 그 모양이 자못 화려하다. 흰색은 기본이고 노란색, 자주색, 진녹색 등이다. 모시송편에 마음이 간다. 까닭인즉 순전히 색깔 때문이다. 쑥떡에 가까워서다.

이전, 구정이라 불렀던 설날 전후는 참 추웠다. 바람까지 곁들이면 몸으로 느끼는 추위는 시쳇말로 장난 아니다. 어머니께서는 설 차례상에 올릴 쑥떡을 만드셔야 했다. 그런데 이게 보통 손 잡히는 일이 아니다. 우선 봄에 캐서 말린 쑥을 삶아야 한다. 삶는 양이 상당하다. 식구들이 많으니 그럴 수밖에.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한참을 기다리면 무쇠솥에서 칙칙거리며 뜨거운 김이 나온다. 어머니께서는 나무 주걱으로 아래 위를 뒤적이라 하신다. 아궁이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연기는 코끝에, 솥에서 모락모락 오르는 수증기는 눈을 자극한다. 눈물 콧물이 흐른다. 쑥떡 만들기의 다음 순서는 쑥 씻기다. 이 과정이 아주 난감하다.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이니, 그땐 특별한 몇 집을 빼고는 마을 공동 우물을 써야 했다. 우물 하나에 마을 세대 수는 많고, 딱한 노릇이다. 어머니께서는 커다란 양동이에 삶은 쑥을 담아 이고, 오리 정도 떨어진 용소(龍沼)로 가자 하셨다. 엄동설한에 오리 길을 걸어 용소에 가는 걸음에 즐거움이 있을까. 고무장갑이란, 당시는 구경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얼음이 언 용소 가장자리를 몽돌로 깨고 그 차가운 물로 쑥을 씻었다. 말간 물이 나올 때까지. 내가 하는 역할이란 바가지에 물을 떠 주는 것이다. 손을 말할 것 없고 볼도 시리고 온갖 투정을 담아 물을 펐던 것 같다. 이 생각이 지나갈 땐 괜히 눈시울이 젖어 든다. 어머니 손은 얼마나 시렸을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시루에 떡을 안치고 익혀 떡메로 쳐서 먹을 만한 크기로 자른다. 마지막으로 콩고물을 입히는 과정을 거친다. 고소한 콩고물 향기에 끌려 한입 베어 물면 그 달콤함이란 무엇에다 비할 수 있으려나. 쑥 씻기의 고달픔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입김만 마음속에 가득하다.

떡 치기의 문화가 사라지면서 가족 간의 소통 또한 사하진 듯하다. 그 원인이 몸으로 같이 하는 경험이 없는 탓이라면 너무 과장된 생각일까? 비 온 뒤 죽순 크듯 어느 순간 내 아이는 30대가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아이와의 대화가 줄어들었다. 텔레비전 공익광고의 모습이 재연되고 있으니 답답하달 수 밖에.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산에 등산이라도 가자고 하면, 웬 뜬금없는 소리냐며 어이없어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와 같이 땀을 흘리며 고생한 경험을 찾기가 참 힘들다. 삶은 쑥을 씻고 당신도 시려웠을 그 손으로 작은 손을 잡고 호∼ 불어 주던 어머니 젊은 모습이 그립다. 이 아이는 훗날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지, 아니 ‘소통’이라는 기억에 자리할 공간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이란 숱한 경험을 통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경험을 직접 몸으로 부딪쳐 가면 좋으련만. 한정된 시간을 살 수밖에 없는 삶이라, 몸으로 하는 경험만 하며 살 수 없음은 당연하다. ‘바보’라는 호로 불러주기를 좋아하셨던 김수환 추기경. 당신께서 깨우쳐 주셨던 귀한 말씀을 불러내 본다.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이었다는 말씀이 새삼스럽다. 몸이 같이하지 않는 낱개의 앎으로 채워가는 우리의 삶. 그래서일까. 지금 우리들의 삶은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외로움에 빠져 허우적댄다. 소통은 정보의 전달이 아닌 감정의 전달이라는 점에서 가족 간 떡메를 치던 왁자했던 기억이 새롭게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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