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 논단 Ⅰ - 잃어버린 역사와 함양사시(咸陽斜視)1
황석산성 논단 Ⅰ - 잃어버린 역사와 함양사시(咸陽斜視)1
  • 경남연합신문
  • 승인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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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장 박선호논설위원황석역사연구소장
연구소장 박선호논설위원황석역사연구소장

 

황석산성 남문성벽은 마치 거대한 만리장성을 보는 듯 이것이 함양을 대표하는 산성이요 성벽이다. 좌우 총안구나 성벽이 없는 만리장성의 바닥만을 옮겨 놓고 성을 복원했다고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성이다.

황석산성대첩 423년 전, 1597년 정유년, 백성을 친형제들처럼 대하며 아꼈던 곽준안음현감이나 군사전략가 황석산성의 군무장 유명개나 조종도함양현감이 공을 들여서 쌓은 성이 이런 성이라고 믿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만약에 성을 복원하는 사람들이 만리장성이나 황석산성대첩 5년 전인 1593년6월, 6만의 진주시민들이 피를 흘린 전투장, 진주성을 한번이라도 봤더라면 이런 형태로는 복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벽이 너무 두텁고 넓어서 성곽위로 올라 서기전에는 바로 앞에 붙어있는 적은 볼 수도 없고 활을 쏘기 위하여 성벽으로 올라서는 순간, 사수들은 숨을 곳이 없고 적에게 노출이 되고 바로 조총을 맞아 죽을 것이다. 이것이 잃어버린 역사를 대하는 함양인의 삐뚜러진 함양사시咸陽斜視? 오만한 고집의 결과다. 적을 조준하여 활을 쏠 수도 없고 조총의 총알을 막을 수 있는 방어벽도 없다. 밝은 달밤에 성벽에 올라서서 긴 칼을 휘두르는 펜싱대회나 개최하면 제격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없는 형태로 판석을 깔아놓고는 “산은 높고 성은 견고하여 뚫을 수도 없고 넘을 수도 없었던” 세계최고의 자연요새(自然要塞)에 걸 맞는 황석산성을 복원을 했노라고 각종 자료에 등장을 시키면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순간도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는 것, 이것이 문제다. 성을 복원한지가 언제인데 그동안 군수가 몇 명이나 바뀌고 문화원장이 몇 명이나 바뀌었는데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함양사시咸陽斜視다?

“小國이 大國의 심사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라는 위화도 회군“에서 시작하여, ”조선을 망하게 한 고종은 자살해야한다.“라고 한 헤이그특사 이상설의 상소까지” 조선은 유교로 시작하여 유교로 망하게 했다는 공자사상, 중국은 일대일로로 전 세계 인민을 착취하여 중국은 부자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를 가난한 나라로 만들려는 공자사상, 백성은 가난해야한다는 공자사상, 조선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사회로 만들고 다수가 노비나 종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하는 공자사상에 깊숙이 젖은 양반의 도시가 함양이고 그들에게 남은 것이 함양사시咸陽斜視다? 두 눈은 뜨고 있고 분명히 두 개의 동공은 있으나 한곳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시각이다.

그들을 식민사관이나 친일파라고 칭한다면 또 다시 난리를 칠지를 모른다. 그러나 너무했다는 마음은 지울 수 없다.

2006년 필자는 모일간지에 황석산성전투는 연구를 다시 해야 한다, 라고 칼럼을 썼고 천사령군수의 도움을 받아 1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었다. 필자는 <황석산성에서 일본군 75,300명의 궤멸>되었다는 사실을 연구해야 하는데 군수님은 역사연구가 방향도, 내용도 없이 아무라도 연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문화계장 최0배는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했다. 필자를 서울에서 불러 내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한여름, 비가 내리는 미끄러운 고속도로의 위험을 감수하고 연구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말단 계장의 사기술에 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리 서울에 있는 나를 부른다는 것은 어떤 무엇인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지 그냥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방에서 만나 차 한 잔을 마시고는 그냥 끝이다? 황당했다! 왜 그랬을까? 그가 내게 무엇을 원했을까? 누구의 지시로? 2007년 12월의 마감 4일을 두고 편성된 1억 원은 <한국산업정보연구소>로 넘어갔다. 이것이 필자가 감지했던 함양사시咸陽斜視의 시작이다.

그들이 3년여에 걸친 황석산성전투고증연구(黃石山城戰鬪 考證硏究)라는 그들의 연구 어느 폐지에도 75,300명은 없고 황석산성 성벽이 세계의 어느 성을 참고하여 축성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도 고증도 전혀 없다. 남문이건 북문이건 동문이건 성 내부에서는 성벽으로 쉽게 접근을 해야 함에도 젊은 사람들도 올라가기도 어렵다. 활을 쏘기도 어렵고 성벽으로 올라가면 적에게 노출이 되어 보호를 받기도 어렵다. 특히나 전투당시 백성군의 구성이 대부분이 노약자들이고 부녀자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활을 쏘고 조총은 어떻게 피했는지? 성벽은 어떻게 올라갔는지? 언급도, 방법도, 수단도 전혀 없다. 그렇다면 성벽에 관한 사전연구가 전혀 없이 판석을 쌓는 어린이들 놀이수준의 복원일 수밖에 없다.

전투당시 남문에는 누각이 있었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다음에 누각을 만들기 위한 작업의 기초가 있었어야 하는데 남문입구를 보면 그에 대한 것은 아무런 대책도, 안내도 없으니 누각을 복원을 하려면 성벽을 다시 허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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