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을 묻는 손님

 

오랜만에 아이 방 청소를 했다. 지나치면서 흘깃 쳐다보면 왠지 허한 기분이 드는 방이다. 타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아이는 어쩌다 집에 들른다. 하룻밤 자고 나면 일이 많다며 불같이 떠난다. 사는 게 뭐 이리도 바쁜지 모르겠다. 청소하다 벽에 걸린 아이의 백일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흩뿌리고 있다. 그때 이 아이는 내 삶의 기쁨이었다. 말소리 하나하나. 움직이는 모습 하나하나. 허투루 흘릴 것이란 게 없었다. 너무 짧았다, 행복감은. 기쁨의 샘물이었던 아이가 자라 미운 일곱 살을 거쳐 학령기에 접어들었다. 아비가 가진 관행적 생각을 아이에게 강조했다. 때로는 난감하다는 듯, 가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뜨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곱씹어 보니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아비로서 아이에게 무얼 이야기하고 강조했는지. 대체 부모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류의 스승 중 한 분이셨던 석가모니, 출가 전 출생한 자식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다. 라훌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장애’라고 한다. 수행에 방해가 되어서라고 그랬다는 이해는 일차원적이다. 상상적 이해를 붙여보고 싶다. 삶 자체가 장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은유는 아닐까. 석가모니는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자신이 깨달은 참된 이치를 일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본다. 라훌라는 붓다의 10대 제자 반열에 오른다. 뭇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마음을 닦고 선행을 하는 밀행 제일로. 자식을 제대로 가르친 경우라 할 것이다.

다산은 40세에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큰아들 학연이 19세, 둘째 아들 학유는 16세, 그리고 막내딸은 9세였다. 가문이 폐족이 되어 몰락한 집안으로 과거시험조차 볼 수 없었다.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자식들에게 마음을 위로하고, 인생의 선배로서 가르침을 편지로 보냈다. 다산이 강조한 가르침의 핵심은 이러했다.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공부뿐이다./근검(勤儉)이 핵심인 경제생활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바라지도 마라./ 제사상을 차리기보다는 나의 책을 읽어다오. 공동선이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강조가 부족한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이지만, 시대적 한계를 감안(勘案) 한다면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다.

2019년, 일본 사회의 처참한 단면을 드러낸 사건 하나를 들여다 보자. 70대 부친이 자택에서 40대 중반의 자식을 살해한 후 자수한 일이다. 부친은 정부 중앙부처 차관급 고위직에서 은퇴한,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였다.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틀어박히다’는 일본어 동사의 명사형)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1990년대 일본 경제의 거품이 터지며 취업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다. 히키코모리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직업도 가지려 하지 않는, 스스로 살아나가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사회적 교류를 일절 거부하기에 히키코모리를 돌보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이런 히키코모리를 돌보는 것은 80대 부모가 50대 자식을 돌보는 것에서 90대 부모가 60대 자식을 돌보는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부모들은 과연 자식들에게 인생의 길을 어떻게 안내했을지 궁금하다.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N포 세대로 일컬어지는 우리 자식들의 이야기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부모는 자식을 반듯한 사회인으로 키워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물론 부모만 온전히 그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학교, 직장, 사회도 그 책임을 분담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의 부모들은 어떤 내용을 자식들에게 강조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자본주의가 뼛속 깊이 구조화 되면서 ‘각자도생’ 즉 ‘나만 잘살면 돼’ 다른 사람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해 가르치는 건 아닌가. 이제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나 또한 그렇게 양육해 온 것을.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생각하지 않는 삶이라 했다. 늦은 철이 드는지 요즘 가끔 생각을 해본다. 과연 각자도생을 강조하는 양육의 결과는 어찌 될 것인지를 말이다.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의 고단한 삶으로 세상이 가득 찰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함께-살아감’이라는 공동체의 붕괴가 눈앞에 선명하다.

자식이란 부모에게 인생의 길을 물으러 온 손님이다. 귀한 손님에게 개인적 잠재성을 키울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참 곤란하다. 공동선을 위한 가치, 보편적인 가치를 더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민이 깊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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