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민란 1862년 전국 단위 임술농민항쟁의 도화선
김시민 장군이 이끈 진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고려 무신정권 조선말기 두 번의 진주민란 일어나

저항정신은 진주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진주정신의 맥이자 뿌리였다. 진주는 역사의 굽이굽이 마다 저항정신으로 역사를 진전시켜왔다. 또 국가가 위태로울 때는 저항정신으로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켜냈다. 고려 무신정권 때와 조선말기 두 차례 진주민란으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 왔으며 진주대첩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해냈다. 

조선시대 진주민란은 농민들의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으로 1862년(철종 13) 2월18일 일어나 이후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민란의 직접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의 불법 탐학에 있었다. 그는 부임한 이래 갖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했는데 그 금액이 줄잡아 4∼5만 냥이나 되었다. 이러한 처사는 그러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른 농민들을 극도로 분격시켰다. 진주 서남쪽 30리 떨어진 유곡동에 사는 유계춘은 김수만, 이귀재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농민운동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그리고 보다 많은 농민을 동원할 방법과 군중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나갈 행동 계획을 마련했다.

 

진주시 수곡면에 있는 진주농민항쟁기념탑. 농민 시위대는 스스로를 초군(樵軍)이라 규정하고 유계춘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구름처럼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사진=박청기자

그 수가 수 만에 이른 농민 봉기군은 자진 해산 때까지 4일 동안 부정 향리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4명을 타살하고 수십 명은 부상을 입혔다. 또 평소 지탄 받던 부호들을 습격해 23개 면에 걸쳐 126호를 파괴한 뒤 재물을 빼앗았으니, 그 피해액이 모두 10만 냥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2월29일 부호군 박규수를 진주안핵사로 임명해 수습하게 했다. 그는 약 3개월에 걸쳐 이 민란을 수습했는데, 그 처벌 상황을 보면 농민 측은 효수(梟首) 10명, 귀양 20명, 곤장 42명, 미결 15명이었고 관리 측은 귀양 8명, 곤장 5명, 파직 4명, 미결 5명이었다.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지방까지 자극해 전국 30여 개 지역 농민 봉기의 시발점이 됐다.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안내문. "이 항쟁을 계기로 농민항쟁은 삼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박청기자

 

◇진주대첩 이끈 김시민 장군...3800 여 군사로 2만 왜군에 대승

진주 고난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김시민 장군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그는 애초 당파와 이해관계를 갖지 않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김시민 장군은 1591년(선조 24) 진주통판으로 천거되었고 진주성을 지켰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1592) 방비태세를 갖추도록 조치했는데, 5월 진주목사 이경이 달아나자 임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왜군이 진주성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오자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을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의 2만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10월5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김 장군은 마지막 날 성안을 순회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을 이마에 맞았다. 치료를 했지만 10월18일 김시민 장군은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1592).

 

진주성 북공문 쪽에 있는 김시민 장군상. 김 장군은 진주대첩 마지막 날 성안을 순회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을 이마에 맞아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진주성 북공문 쪽에 있는 김시민 장군상. 김 장군은 진주대첩 마지막 날 성안을 순회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을 이마에 맞아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사진=박청기자

 

◇“이곳이 우리가 죽을 곳입니다” 아들과 남강 투신한 김천일 장군

1592년 왜적은 파죽지세로 진격해 한성(서울)을 점령했다. 김천일은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5만 관군이 수원에서 겨우 수천의 왜적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고경명·박광옥·최경회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피난 간 평안도를 향해 진군하다 왜적과 싸우면서 수원성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갔다. 김천일은 그 공으로 판결사가 되고 창의사의 호를 받았다.

1593년 6월15일 왜적은 카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주력 장수를 내세워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김천일 장군은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부장 임우화를 성밖으로 보냈으나 곧 왜적에게 잡히고 만다. 임우화는 나무기둥에 묶여 조선군의 항전의지를 꺾고자 한 왜적의 인질이 됐다. 이어 양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왜적도 총력을 다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동분서주하며 눈부신 활약을 펼치던 황진은 이마에 총탄을 맞고 급사했고 화살은 떨어져 백병전이 벌어졌다. 병사들은 부러진 창검을 버리고 대나무 창으로 응전하였다. 6월29일 결국 성이 함락돼 촉석루로 밀려나자 김천일 장군은 “이곳이 우리가 죽을 곳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아들 김상건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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