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 젊은 농부들 귀농 정보 교류
귀농·귀촌 붐 타고 전국 회원 수 늘어나
4-H운동, 새마을운동의 밑바탕이란 평가
4-H운동은 국가 장래를 이끌어갈 청소년들 교육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이들이 지·덕·노·체의 4-H이념을 생활화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고 농심을 배양하며 창조적 미래세대로 성장토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후 여러 시대를 거치며 청소년뿐만 청년, 학교, 4-H본부 등 연령에 맞는 연합체로 확대되었다.
4-H는 명석한 머리[Head, 智育], 충성스런 마음[Heart, 德育], 부지런한 손[Hands, 勞育] 및 건강한 몸[Health, 體育]을 의미하는 네 가지의 이념[4-H]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단어의 의미를 각각 지(智)ㆍ덕(德)ㆍ노(勞)ㆍ체(體)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4-H운동이 다른 청소년운동과 다른 점은 농업ㆍ환경ㆍ생명의 가치를 창출하고 청년농업인4-H회원의 경우 우리 농업과 농촌사회를 이끌어갈 전문농업인으로서 자질을 배양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청소년교육이 지육ㆍ 덕육ㆍ체육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비해 4-H운동은 노육을 추가하고 현장교육과 실천과제 등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하고 있다.
지구촌 80여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4-H연합회는 한국에선 1945년 해방직후 시작됐다. 일제시대 이후 낙후된 농촌의 부흥과 실의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당시 구자옥 경기도지사와 경기도 군정관인 앤더슨 중령, 이진묵 경기도 문정관 등이 미국의 4-H활동을 도입하기로 하고, 경기도 일원에 ‘농촌청소년구락부’를 결성하기 시작해 50년까지 1900여개 마을에 5만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6ㆍ25전쟁으로 잠시 중단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2년 12월 정부가 4-H운동을 국가시책사업으로 채택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업의 각 분야를 도와주기 위해 1953년 8월 한미재단이 발족되었고, 11월에는 민간추진단체인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가 결성되었으며, 4-H중앙경진대회를 개최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련의 정책수립과 후원체제를 바탕으로 4-H운동은 전후 복구와 농촌재건운동과 연계해 추진되었다.
1962년 3월 농촌진흥청이 발족되면서 정부의 조직적인 지원으로 4-H운동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고, 1965년에는 특수지도사의 부활과 4-H민간단체 육성, 자원지도자 연찬회, 4-H연합회 육성 등을 통해 활성화 여건을 마련했다. 또한 4-H회원의 연령을 10~20세에서 13~24세로 변경하는 한편, 전국대학4-H연구회연합회 결성과 4-H신문의 발행, 4-H운동발전연찬회 개최, 전국4-H지도자야영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추진되어 농어촌의 환경개선, 농업생산기반의 정비, 주곡의 자급기반 확충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새마을운동에 20여년 앞서 시작된 4-H운동은 새마을운동의 밑바탕이 되었으며, 71년 제9차 농촌청소년지도자회의, 76년 한국4-H운동 30주년을 겸한 연찬회 등을 통해 4-H지도자들이 4-H운동의 진로를 모색하는 각종 회의가 개최되었다.
1981년 한국4-H중앙연합회가 창립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원단체로 가입하면서 조직관리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었으며, ‘4-H구락부’ 명칭도 ‘새마을청소년회’로 바뀌었다. 1983년에는 한국4-H후원회 사업 일부도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어 4-H운동은 새마을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고 100만 회원이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87년에는 ‘한국4-H운동40년사’를 발간해 그간의 역사를 정리 했고, 88년에는 ‘4-H회’라는 이름을 되찾는 등 4-H운동이 전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였다.
하지만 농촌에 기반을 두었던 4-H운동은 산업화와 인구의 도시 이동, 특히 농촌사회의 붕괴라고 불릴 만큼 급격한 변화 속에서 회원의 감소 등으로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0년 서울 강동구 명일동에 한국4-H회관을 건립함으로써 4-H운동 추진에 새로운 발전적 전기를 맞게 되었다. 불우이웃돕기 등 인보활동을 전개하고 학생4-H회를 통해 4-H이념을 확산시켜 지역사회 청소년교육운동으로 뿌리를 내렸다. 또 농업과 농촌을 이끌어갈 후계세대인 영농회원들은 특화작목 등으로 농업의 활로를 찾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새로운 사회변화에 발맞춰 회원의 연령을 조정해 회원 배가운동을 전개하고 자연ㆍ농촌사랑 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각종 교육 및 연수활동을 강화했다. 또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정보화 및 리더십교육, 각종 활동프로그램의 개발 보급, 도농교류 확대, 과제교육 활성화사업 등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특히 그동안 4-H의 3대행사인 청소년의 달 행사, 야영교육, 중앙경진대회를 더욱 내실 있게 추진하여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청소년활동으로 자리 매김했다. 특히 4-H활동지원법의 제정과 이 법에 따른 4-H시책 수립, 주관단체 지정 등을 통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농업ㆍ환경ㆍ생명운동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4-H민간추진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청군 청년4-H
산청군에도 청년4-H연합회가 있다. ‘지·덕·노·체’의 4-H이념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사고와 친환경적인 농업체험으로 농심 함양과 농업인 복지증진 및 소득증대 등 살기 좋은 산청건설을 위해 조직된 학습단체다.
산청군엔 2018년 24명 회원이 있으며 지역청년 리더교육, 학습과제포장 운영, 농업전문 기술교육, 도·농교류, 한마음대회, 농촌봉사활동, 정보공유 및 친목도모를 주요활동으로 한다.
산청군 청년4-H는 2010년 박대권 회장, 2013년 김한 회장에 이어 2016년 취임한 권영민 회장이 현재까지 이끌어 가고 있다. 또 시작 당시 5명 회원이었으나 귀농·귀촌 붐을 타고 회원 수도 급격히 증가했고, 이와 더불어 회원들의 활동 및 산청군 지원도 늘어나고 있다.
권영민 산청군 청년4-H연합회장은 “청년4-H는 다양한 작물을 키우는 농업인이 많아 회원 및 귀농인들과의 정보 교환을 통해 현시대에 맞는 농업 및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다. 또 회원 간 협의를 거쳐 지속적인 과제 활동과 교류를 통해 산청 농업의 요람으로 키워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청 청년4-H의 한 회원은 “타지역에서 귀농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 젊은 농부가 없어 정보교류 및 친목도모가 부족했으나 4-H를 알게 된 뒤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진다. 농사의 정보뿐만 아니라 같은 세대 사람들끼리 모여 지낼 수 있어 귀농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산청 청년4-H는 2017년 경남대회 참석, 선진지 견학, 합동 과제포조성 등을 했다. 2018년 초에는 회원들 정신건강 및 심리상담을 위해 힐링캠프를 진행했다. 또 과제교육을 통해 유통 마케팅 견학을 할 예정이다. 이어 선진지 견학, 합동과제포 운영 등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젊은 농부들 역량을 강화 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 허기도 산청군수는 “청년농업인 육성사업은 산청군과 같은 강소군의 미래는 물론 대한민국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며 “농업의 가치와 발전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보다 편하게 지역에 정착하고 선배 농업인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청년창업형후계농 지원사업, 청년농업인 경쟁력 제고사업, 청년농업인 기반조성 사업, 청년4-H 연합회 육성 지원 등을 통해 젊은이들이 꿈을 품고 돌아올 수 있는 산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