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곡사서 공부했던 亡兄 추억 인생무상 노래

1500년 초기에 진주목사로 있었던 송재 이우는 퇴계 이황 선생의 숙부로 당시 퇴계의 셋째 형 이의와 넷째 형 이해가 숙부를 따라 진주로 와서 청곡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진은 경남 진주시 금산면 월아산로1440번길 138에 위치한 청곡사.
1500년 초기에 진주목사로 있었던 송재 이우는 퇴계 이황 선생의 숙부로 당시 퇴계의 셋째 형 이의와 넷째 형 이해가 숙부를 따라 진주로 와서 청곡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진은 경남 진주시 금산면 월아산로1440번길 138에 위치한 청곡사.

 

[退溪先生過靑谷寺詩碑 청곡사를 지나며]

琴山道上晩逢雨 금산길 지나다가 늦게 비를 만났더니,

靑谷寺前寒瀉泉 청곡사 앞 샘에서는 찬물이 솟는구나.

謂是雪泥鴻爪處 인생살이는 바로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 같다고들 하니

存亡離合一潸然 생사(生死)와 이합(離合)이 하나의 슬픈 눈물로 흐르네.

상기 한시(漢詩)는 현재 진주 청곡사 시판에 걸려있는 시로써 기록에 의하면 이 작품은 퇴계 이황이 1533년 3월28일 진주 남강 촉석루에 들러 <촉석루>라는 시를 지은 다음, 한 달쯤 후인 4월말 경 비오는 날, 진주 청곡사에서 지은 시라고 전해오고 있다.

1500년 초기에 진주목사로 있었던 송재 이우(松齋 李瑀)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의 숙부로 당시 퇴계의 셋째 형 이의(李漪)와 넷째 형 이해(李瀣)가 숙부를 따라 진주로 와서 이 곳 청곡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퇴계 선생이 청곡사에 들렀던 해는 1533년으로 26년 전 형들이 공부했던 곳에 들렀으니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퇴계가 청곡사에 들렀을 당시 넷째 형은 관직에 있어서 가끔은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셋째 형은 1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퇴계는 청곡사에서 먼저 세상을 하직한 셋째형이 그리워져서 이 시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던 것이라 하겠고 형들과 함께 지냈던 옛일을 회상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시로 지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퇴계 선생은 그 당시 곤양 군수로 있던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을 만나러 가던 중이었다. 가는 길에 잠시 월아산 법륜사에 들러 강회숙과 강응규를 만나 보려 했으나 길을 잘못 들어 금산을 경유하여 청곡사를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관포 어득강은 뒤에 대사성을 지냈고, ‘관포선생시집’으로 유명하다. 평소 자연을 사랑하고 해학을 즐겨했던 성품이어서 1886년에 쓰여진 고전소설 ‘어득강전’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실제 인물과는 다르다.

금산면의 아름다운 호수(금호지)에 가면 퇴계 선생이 청곡사를 지나다가 시를 지었다는 의미에서 ‘퇴계선생 과청곡사시비(退溪先生 過靑谷寺詩碑)’라고 새겨진 유적비를 볼 수 있다.

 

큰제목: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 여윈 퇴계

부제목: 진주목사였던 숙부 영향 많이 받아

 

사진설명: 1533328일 퇴계가 곤양군수 관포 어득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촉석루에 올라 촉석루라는 제목의 7언시를 작성한다. 사진은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1에 위치한 촉석루.

 

 

그리고 그의 <촉석루>라는 제목의 7언시가 보물 제1895인 그의 <퇴계선생문집> 속에 또 보인다.

 

落魄江湖知幾日 강호에 떨어져 산 지 며칠이나 되었던고

行吟時復上高樓 거닐며 시를 읊다 높은 누에 올라 보네

橫空飛雨一時變 공중에 비끼는 비 한 때의 변화라면

入眼長江萬古流 눈에 보이는 긴 강은 만고의 흐름이라.

往事蒼茫巢鶴老 지난 일 아득해라 둥우리의 학은 늙고

羇懷搖蕩野雲浮 나그네 회포 흔들림이 들판 위의 뜬구름 같네.

繁華不屬詩人料 번화한 것 시상에 들어오지 않나니

一笑無言俯碧洲 그저 한 번 웃고 말없이 푸른 물을 굽어보네.

 

상기 시는 처음 인용했던 그의 <靑谷寺>라는 작품보다는 약 한달 앞서 같은 해 328일경에 퇴계가 곤양군수 관포 어득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촉석루에 올라 지은 시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진주를 그의 명시를 통해 전국으로 알린 퇴계 이황은 과연 어떤 분이며, 진주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학자이며 교육자, 화가, 시인으로 다재다능한 분이었다. 정치가보다는 학자로서 더 명망이 높았던 분으로 조선 명종과 선조 시대의 사상가이며 성리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경북 안동시 예안현 온계리(溫溪里)이며, 이식의 71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께서 공자가 대문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립문(聖臨門)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 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윈 퇴계는 홀어미 밑에서 자라야 했고, 커서도 둘째형 이해가 을사사화로 죽고, 27세에 상처하며, 둘째 아들이 요절하는 등 슬픈 가정사를 안고 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瑀)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송재 또한 시에 능한 사람으로 관동행록에 그의 시가 전해온다.

퇴계가 시를 잘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숙부의 영향이 컸다. 또한 송재는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퇴계의 두 형이 숙부를 따라 진주에 와서 청곡사에서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째형이 을사사화로 목숨을 잃는 변을 당한다. 뒤에 이황은 청곡사에 들러 시를 남겼는데 이미 앞에서 퇴계선생 과청곡사시비(退溪先生 過靑谷寺詩碑)’를 통해 소개했다.

1529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으나 정쟁(政爭)을 피하여 외직을 자처한다. 풍기군수시절부터 소수서원을 육성하여 사림을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퇴계는 사색과 ()’을 중시했으며,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다. 그는 1570(70)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인심경석의(人心經釋疑), 사단칠정분리기서(四端七情分理氣書) 등의 저서와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가져간 그의 저서로 인하여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에도(江戶)시대에는 기본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에는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결국 오늘 진주가 천년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위치에 오를수 있었던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이미 오래전부터 퇴계 이황과 같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대명유들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 여윈 퇴계

진주목사였던 숙부 영향 많이 받아

 

사진설명: 1533년 3월 28일 퇴계가 곤양군수 관포 어득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촉석루에 올라 ‘촉석루’라는 제목의 7언시를 작성한다. 사진은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1에 위치한 촉석루.

그리고 그의 <촉석루>라는 제목의 7언시가 보물 제1895인 그의 <퇴계선생문집> 속에 또 보인다.

落魄江湖知幾日 강호에 떨어져 산 지 며칠이나 되었던고

行吟時復上高樓 거닐며 시를 읊다 높은 누에 올라 보네

橫空飛雨一時變 공중에 비끼는 비 한 때의 변화라면

入眼長江萬古流 눈에 보이는 긴 강은 만고의 흐름이라.

往事蒼茫巢鶴老 지난 일 아득해라 둥우리의 학은 늙고

羇懷搖蕩野雲浮 나그네 회포 흔들림이 들판 위의 뜬구름 같네.

繁華不屬詩人料 번화한 것 시상에 들어오지 않나니

一笑無言俯碧洲 그저 한 번 웃고 말없이 푸른 물을 굽어보네.

상기 시는 처음 인용했던 그의 <靑谷寺>라는 작품보다는 약 한달 앞서 같은 해 3월 28일경에 퇴계가 곤양군수 관포 어득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촉석루에 올라 지은 시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진주를 그의 명시를 통해 전국으로 알린 퇴계 이황은 과연 어떤 분이며, 진주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학자이며 교육자, 화가, 시인으로 다재다능한 분이었다. 정치가보다는 학자로서 더 명망이 높았던 분으로 조선 명종과 선조 시대의 사상가이며 성리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경북 안동시 예안현 온계리(溫溪里)이며, 이식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께서 공자가 대문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립문(聖臨門)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 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윈 퇴계는 홀어미 밑에서 자라야 했고, 커서도 둘째형 이해가 을사사화로 죽고, 27세에 상처하며, 둘째 아들이 요절하는 등 슬픈 가정사를 안고 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瑀)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송재 또한 시에 능한 사람으로 「관동행록」에 그의 시가 전해온다.

퇴계가 시를 잘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숙부의 영향이 컸다. 또한 송재는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퇴계의 두 형이 숙부를 따라 진주에 와서 청곡사에서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째형이 을사사화로 목숨을 잃는 변을 당한다. 뒤에 이황은 청곡사에 들러 시를 남겼는데 이미 앞에서 ‘퇴계선생 과청곡사시비(退溪先生 過靑谷寺詩碑)’를 통해 소개했다.

1529년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으나 정쟁(政爭)을 피하여 외직을 자처한다. 풍기군수시절부터 소수서원을 육성하여 사림을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퇴계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으며,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다. 그는 1570년(70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인심경석의(人心經釋疑), 사단칠정분리기서(四端七情分理氣書) 등의 저서와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가져간 그의 저서로 인하여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에도(江戶)시대에는 기본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에는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결국 오늘 진주가 천년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위치에 오를수 있었던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이미 오래전부터 퇴계 이황과 같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대명유들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강신웅 교수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