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혈성단·신간회 등 전국 규모 단체서 활약

▶지난호에 이어

동아일보 기자였던 강우석 선생은 진주에서 조직된 전국 규모의 단체인 진주YMCA, 국민회, 혈성단, 신간회 등에 모두 가입해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은 진주시 중앙동 기독교계 광림학교가 있었던 곳.
동아일보 기자였던 강우석 선생은 진주에서 조직된 전국 규모의 단체인 진주YMCA, 국민회, 혈성단, 신간회 등에 모두 가입해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은 진주시 중앙동 기독교계 광림학교가 있었던 곳.

 

곧 국민회, 혈성단, 신간회, 기독교청년회 등에 가입하였는데 이들 단체들은 모두 진주지역만을 위한 지역 단체가 아닌 전국 규모의 단체이거나 임시정부와 관련된 단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주YMCA 역시 지역 단체 겸 서울을 중심으로 한 YMCA이었음이 확실하다. 강우석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였으며 진주에서 조직된 전국 규모의 단체인 진주YMCA, 국민회, 혈성단, 신간회 등에 모두 가입하고 활동한 분이다.

「대구 YMCA 80년사」 112~115면에 합천 YMCA, 초계 YMCA 등이 있었고 대구에서 강연하기 위해 방문한 일이 있음을 밝혔고 123면~ 등에 의하면 마산호신학교, 숭실학교, 계성학교, 경신학교 YMCA가 조직되었음을 밝혔다. 대구 Y 창립연대에 대하여 세가지 주장 가운데 1915년 설립설, 1921년 설립설 등이 있었으나 1918년을 기점으로 정한 것은 서울 YMCA에 보존되었다는 전국 Y 조직에 대한 창립기록이 없거나 믿을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 진주는 도청소재지로 여러 상황을 보아 1920년 7월에 진주 YMCA가 창립되었음이 확실하다. 「전주 서문교회 백년사」에도 1920년대 활동을 전주 YMCA로 인정하고 서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봉래동 교회가 Y 역사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1930년~1940년대에 진주 YMCA 활동이 없었다고 해서 앞의 역사를 무시하고 1947년을 기점으로 삼아 창립연대를 잘못 서술하는 것은 역사의 죄인이요, 커다란 범죄를 일으키는 일과 같으므로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잡아야 마땅한 일이다.

강우석 선생은 말년에 사천시 서포면 신흥마을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살다가 별세하여 그곳에 묘지가 조성되었다. 강우석 선생은 죽산박씨 박종순과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강종수가 호두 시드니에 거주하면서 중국, 홍콩, 마카오 등지에 다니며 사업 중인데 대구에 사는 친구 최덕영(崔德永)에게 부친의 역사 찾기를 부탁하면서 필자와 연결되었다. 필자가 수개월 간 고생하며 자료를 찾아 「경남일보」 1994년 8월 14일자에 항일 내용을 발표하고 일제 강점기 자료 및 포상신청서를 정부에 제출한 결과 1995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후손 말씀이, 서포 묘소에 공적비를 세우겠다고 알려왔으므로 도와준 뒤 1996년 1월 1일 제막식에 참석하였고 그 사실을 「진주신문」 1996년 1월 1일자에 공적비 사진과 함께 상세히 보도되도록 힘썼다. 그러나 그 후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다음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등재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는 1919년 9월 진주(晋州) 광림학교(光林學校) 교사로 재직 중, 홍수원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혈성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주로 군자금 모집활동과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폈다.

그리하여 박만선(朴萬善) 등과 함께 오재영(吳哉泳), 김두현(金斗鉉)으로부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을 배부 받아 각처에 배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선전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한편 혈성단은 이 무렵 서울에서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등과도 연결되어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당시 국내 독립운동계는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하나로 합쳐 통합임시정부를 설립하게 됨에 따라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 때처럼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서로 연대하면서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다. 이에 강우석을 비롯한 혈성단에서도 이와 같은 ‘제2회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사전 발각됨으로써 1919년 11월 초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21년 1월 27일에 다시 징역 8개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2년부터 「동아일보」 하동지국(河東支局)에서 일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어 전국 각처에 지회가 조직될 때, 그는 마산지회(馬山支會) 창립에 큰 힘을 쏟아 1927년 12월 29일 세칙제정위원(細則制定委員)으로 활약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아름다운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추호석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

진주문화원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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