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후면 계단 좌측 하연의 7언시 등

진주성 촉석루 내에는 시판의 시문과 주련 그리고 촉석루 후면 계단 좌측에 초서체로 된 하연의 7언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은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1에 위치한 촉석루.
진주성 촉석루 내에는 시판의 시문과 주련 그리고 촉석루 후면 계단 좌측에 초서체로 된 하연의 7언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은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1에 위치한 촉석루.

 

지난 2017년 11월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본사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에서는 무려 29회에 걸쳐 진주 일원에 산재되어 있는 각종 유명 문화재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문헌과 자료를 근거로 그 가치와 역사를 재조명해왔다.

이번 30호부터는 고려·조선 양조에 걸쳐서, 전국적인 명인(名人)들이 그간의 우리 진주·진양의 경관과 사연을 읊고 노래해 남긴 유명 시문(詩文)들을 작가들의 평전(評傳)과 그들 작품해설 중심으로 기술해보고자 한다.

우선은 현재까지 진주성 촉석루 내에 걸려 있는 시판의 시문과 주련(柱聯) 그리고 제일 먼저, 촉석루 후면 계단 올라 좌측에 거의 초서체로 된 경재(敬齋) 하연(河演)의 촉석루에 관한 7언시부터 읽기로 한다.

高城絶壑大江頭 높은 성 깎은 벼랑 큰 강머리에

冬柏梅花矗石樓 동백 매화 우거진 곳에 촉석루가 서있구나.

若也登臨留勝蹟 만약 이 곳에 올라 좋은 흔적 남기려면

請題佳句記吾州 청컨대 좋은 글 지어 우리 고을에 적어놓게나.

상기 시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연량(淵亮)이고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로 부윤 자종(自宗)의 아들인 하연(河演)의 작품이다.

그는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96년(태조 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하였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판서·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23년(세종 5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曹溪宗)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 받았으며,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고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 1년)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 되었고 단종 2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문효(文孝)의 시호가 내려졌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 「진양연고 晉陽聯藁」가 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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