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 말살정책에도 오광대 등 전통 계승

사진은 진주시 남성동에 위치한 영남 포정사 문루. 고종 32년(1895)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될 때 관찰사 청사의 관문으로 영남 포정사라 했으며 도청의 정문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3만명의 시위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맞섰다.
사진은 진주시 남성동에 위치한 영남 포정사 문루. 고종 32년(1895)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될 때 관찰사 청사의 관문으로 영남 포정사라 했으며 도청의 정문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3만명의 시위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맞섰다.

▶30호에 이어

 

▣ 도청이전 반대와 기타 활동

박용근 선생은 1923년경부터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부산 이전을 반대하는 위원(委員)으로 활동하게 된다.

조선 종이 수천 장을 구입해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려고 준비하던 중 일경에 의해 발각(發覺)되어 집안 전체가 수색(搜索)당하는 일도 있었다. 박준기 아들이 7세 때 조선 종이로 격문을 만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가족들이 모두 경찰서에 잡혀 간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박준기 지사가 말하기를 부친께서 측량기술을 배웠다는데 정확한 문헌 근거가 없다. 일제가 전답을 측량하고 측량기술(測量技術)을 가르친 목적(目的)이 땅의 경계(境界)를 명확히 한다는 뜻도 있지만 조선인(朝鮮人)의 땅을 수탈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박용근 선생이 그 같은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박용근 선생이 1930년대에는 주로 활쏘기에 취미를 붙여 궁도장(弓道場) 출입 책임을 맡았다. 그는 담력(膽力)과 근력(筋力)이 세고 신장이 큰 분이었다고 전해온다.

궁도장에 출입할 때 일본순사(日本巡査)를 만나 시비가 붙어 싸우기도 했다는데 경찰서(警察署)에 잡혀가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경찰서에 들어가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겸손하고 점잖은 사람이 되니 다른 순사들이 말하기를 이같이 신사적(紳士的)인 분이 어찌 시비(是非)를 하겠는가 하면서 바로 방면(放免)하였다는 것이다.

전라도에 가서 활쏘기 대회에 출전하여 1, 2등을 한 적이 많았는데 이를 시기한 전라도(全羅道) 사람에게 귀를 맞고 고막이 찢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곳에서는 말없이 떠난 후 때린 자의 집을 찾아가 대문(大門)을 박살내고 안방까지 쳐들어갔다는 일화(逸話)가 전해진다.

박용근 선생은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만 57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문화발전(文化發展)에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진주신문>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문화(民族文化)를 정책적으로 말살하려고 책동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진주의 전통인 오광대를 연구하고 가면극(假面劇)을 직접 만들어 지도하면서 민족의 비극을 달래는 처절한 투쟁을 계속했다. 이와 같은 그의 모습은 일제에 대한 반감과 나라사람 민족사람으로 승화되었다.

1919년 3월 10일 진주시내에 3.1운동을 촉구(促求)하는 격문(檄文)을 몰래 붙일 때 그 역시 날쌘 동작으로 붙이는 투쟁을 전개했을 것이다. 3월 18일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다섯 장소에서 동시에 3.1만세운동이 시작될 때 선생은 오광대 춤 시나위로 군중의 선두(先頭)에서 지도(指導)하니 청년‧학생(靑年‧學生)들도 이에 동조하는 형세로 이루었다. 이와 같은 투쟁은 민족(民族)의 운명(運命)이 걸린 것이라는 투철한 생각과 나라사랑의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청년기 일화

다음은 선생의 청년 시절의 일화(逸話)이다.

진주시 중안동에 사는 박소사(朴召史)라는 처녀(處女)가 살고 있고 그 부근에 일본인(日本人)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 일본인이 박소사의 미모(美貌)에 반해 짝사랑하게 되었다.

하루는 일본인이 박소사에게 말하기를 술집에 들어가 한 잔 하자고 말했으나 듣지도 않고 가는 것이었다. 이 때 권총(拳銃)을 꺼내더니 위협하며 흉부(胸部)에 들이대고 같이 가지 않으면 쏘겠다고 협박(脅迫)하였다. 그러자 박소사가 손으로 총구(銃口)를 막으며 말을 듣지 않았다. 열이 난 일본인이 진짜로 총을 발사(發射)해 버렸다.

총(銃)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인근(隣近)에 있던 박 선생이 총소리를 듣고 현장(現場)에 급히 달려 가보니 한 동네 사는 박소사가 피를 흘리고 있고 사람들이 먼 곳에 서서 보기만 할 뿐 누구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박소사를 보니 피를 흘리면서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 바로 옆에는 일본인(日本人)이 총을 든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박 선생은 옆 발차기로 일본인을 제압(制壓)하고 총을 빼앗아 버렸다. 그 일본인을 진주경찰서로 끌고 가서 인계(引繼)하고 엄중하게 경고(警告)하고 처벌해 주기를 주문했다.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박소사는 흉부에 맞지 않고 엄지손가락에 맞아 손가락이 절단(切斷)되어 혼절(昏絶)하였다. 일본인을 경찰서 유치장(留置場)에 가두었는지 확인(確認)하고 박소사를 업고 진주의원(晋州醫院)에 입원(入院)시켜 치료(治療)토록 주선해 준, 선한 사마리아 이웃이 되었다.

이 기록은 경남일보 1910년 1월 15일자에 보도되었고 김용하 선생이 전해 준 이야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기술해 본다.

박용근 선생의 용기(勇氣)있는 행동(行動)과 의리(義理)를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그의 연령은 28세였다.

▣ 유공자 포상과 선양

박용근 선생의 항일공적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68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묘소가 진주에 있었으나 최근에 대전국립현충원(大田國立顯忠院) 199에 안장하였다.

추호석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

진주문화원 향토사학자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