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 임란때 의병조직 큰 공
한몽삼, 진주 절경 명필로 극찬

충의사는 조선 선조 때 명장 충의공 정문부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사진은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16-2에 위치한 충의사 전경.
충의사는 조선 선조 때 명장 충의공 정문부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사진은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16-2에 위치한 충의사 전경.

 

본지의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에서는 지난 30호부터 진주 촉석루 경내에 걸려 있는 전대 명인들의 시문(詩文)을 그들 작가의 행적과 사상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제30호에서는 경재(敬齋) 하연(河演)과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제31호에서는 우당(憂堂) 박융(朴融)과 만송(朴融) 강렴(姜濂)의 작품들을 원문과 함께 감상해보았다.

본 32호에서도 계속해서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와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진주 촉석루에 관한 시문을 작가의 행적과 작품해설 중심으로 기술해 보기로 한다.

우선은 현재 진주 반성면의 충의사에 향사(享祀)되어 있는 농포 정문부의 작품부터 읽기로 한다.

龍歲兵焚捲八區 임진년 전쟁이 팔도를 휩쓸어 올 때

​魚殃最慘此城樓 무고한 재앙, 이 성루가 가장 처참하였어라.

石非可轉仍成矗 굴릴 수도 없는 돌, 이내 촉석 이루었고

​江亦何心自在流 무슨 맘에 강은 또한 절로 흘러가는가.

起廢神將人共力 폐허를 일으키는 일에 신과 사람 함께 하고

​凌虛天與地同浮 빈 하늘을 달려 봐도 천지가 함께 떠다녔다.

​須知幕府經營手 모름지기 알리라 막부의 경영솜씨

​壯麗非徒鎭一州 장려하구나, 다만 한 고을만 진압할 일 아님을.

상기 작품을 후대 학자들은 중국 <시경(詩經)>의 <<백주편(柏舟篇)>>에 나오는 “我心匪石, 不可轉也, 我心匪石 不可卷也” 즉, “내 마음 돌이 아니라서, 굴릴 수도 없고, 내 마음 돗자리가 아니라서 말수도 없네.”라는 부분과 비유하기도 한다.

상기시를 지은 정문부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의병장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이다. 부사 신(愼)의 아들로 1585년(선조 18년)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회령의 반민 국경인이 임해군·순화군두 왕자와 아들을 호종한 김귀영·황정욱·황혁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최배천·이붕수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각 진의 수장(守將)·조사(朝士)들과 합세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한몽삼 선생은 1639년 자여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314-2에 위치한 임천서원 전경. 이 곳에 한몽삼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한몽삼 선생은 1639년 자여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314-2에 위치한 임천서원 전경. 이 곳에 한몽삼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먼저 국경인·국세필을 잡아 참수하였고, 이어서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에서 싸워 대승하였으며, 쌍포전투(雙浦戰鬪)와 이듬해 백탑교 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길주목사·안변부사·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12년 형조참판, 1615년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하여 나가지 않았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후에 신원(伸寃)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농포집」이 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래서 현재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에 사당과 종택이 있다.

다음은 현재 진주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임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작가 한몽삼이 진주의 절경에 감동하여 영원히 진주에 살고 싶다고 노래한 그의 최고 명필의 서체로 쓰여진 작품을 소개하면;

天地初開別一區 천지지간에 처음으로 특별한 곳 열었으니

何年好事起事樓 어느 해 호사가가 이 다락을 세웠는가

​層軒遠樓靑山影 겹친 마루 먼 누각에 청산이 아롱지고

​彩檻低搖碧水流 채색한 난간 아래로 푸른 물만 흘러라.

斗覺登臨如羽化 올라보니 날개 돗듯 시원함을 깨닫고

​却疑身世等萍浮 몸은 문득 부평초 같이 물에 뜬 듯하구나.

​求封萬戶還非分 만호의 벼슬구함은 내 분수에 맞지 않아

​願夢三刀臥此洲 원하노니 영전하여 이 고을에 머물었으면,

상기 시를 지은 한몽삼(韓夢參)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자변(子變), 호는 조은(釣隱) 또는 적암은인(適巖隱人)이다. 아버지는 참봉 계(誡)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주(鑄)의 딸이다. 박제인(朴齊仁)·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 몽룡(夢龍) 밑에서 학업에 정진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639년(인조 17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관직을 멀리하고 산수가 수려한 파릉군(巴陵郡)의 서계(西溪)가에 은거하였다. 1702년(숙종 28년)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되고, 1729년(영조 5년)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조은집』 4권이 있다.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강신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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