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을 경치 뛰어난 줄 이제야 알겠구나

진주시 본성동 500-1에 위치한 촉석루 전경.
진주시 본성동 500-1에 위치한 촉석루 전경.

 

제30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고려·조선조에 뛰어난 문신이나 문걸들이 진주 및 촉석루의 경관이나 역사적 사실을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낭만으로 노래했던 작품들을 그들의 개인적 행적과 사상을 바탕으로 기술해 왔다. 특히 이번호에서는 먼저 중국 당(唐)대의 시선(詩仙)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유명하여 거의 중국문학에 전설적인 시인인 이백(李白)조차도 감동했던 중국 당(唐본)대의 시인인 최호(崔顥)가 읊었던 중국의 호북성 무창현 황학산에 있는 그 유명한 황학루(黄鹤楼)와 축석루를 비교해서 노래했던 고려 말 뛰어난 문신인 면재(勉齋)·정을보(鄭乙輔)의 작품을 소개하고 이어, 조선중기의 문신인 한사(寒沙)·강대수(姜大遂)의 촉석루와 남강에 대한 그의 애절한 시를 그의 행적과 함께 기술하고자 한다. 우선 면재(勉齋)·정을보(鄭乙輔)의 장시(長時)인 배률육문(排律六韻)을 소개하자면;

[晉州矗石樓]

黃鶴名樓彼一時 황학이라 이름난 누각은 저 한 때의 일인데

崔公好事爲留詩 최공(崔公: 崔顥)은 일삼기 좋아하여 시를 남겼네.

登臨景物無增損 올라보니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題詠風流有盛衰 시를 짓고 읊조리는 풍류에는 성쇠가 있네.

牛壟魚磯秋草沒 고기 낚고 소 매던 곳 가을 풀은 시들고

鶖梁鷺渚夕陽遲 백로와 수리 놀던 물가에 석양은 더디 지네.

靑山四面皆新畵 사방의 푸른 산은 갓 그려낸 그림이요,

紅粉三行唱古詞 세 줄로 선 기생들 옛 노래 부르네.

玉斝高飛山月上 옥 술잔 높이 드니 산달이 솟아오르고

珠簾半捲嶺雲垂 주렴을 반쯤 걷으니 영마루에 구름 드리웠네.

倚欄回首乾坤小 난간 잡고 둘러보니 천지가 작게 보여

方信吾鄕特地奇 우리 고을 경치 뛰어난 줄 이제야 알겠구나.

상기 시문에서 보았듯이 촉석루는 고려시대 중국의 그토록 유명한 황학루(黃鶴樓)와 비교할 정도로 특출한 누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에 위치한 도연서원.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된 이 곳엔 주이·강인수·문익성·강대수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다.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에 위치한 도연서원.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된 이 곳엔 주이·강인수·문익성·강대수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다.

온 세상 폐허…촉석루는 무사하도다

강대수, 임란 이후 좋은 일 암시

상기 시의 작가 정을보((鄭乙輔)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다. 호는 면재(勉齋), 본관은 진주(晉州), 평장사 정연(鄭椽)의 아들로 1320년(충숙왕 7년) 국자시(國子試)에서 고부(古賦)에 합격하였다. 1345년(충목왕 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후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1352년(공민왕 1년) 조일신(趙日新)의 세력을 배경으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나 곧 조일신이 주살되자 그 일파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광양감무로 좌천되었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여기서 청천(菁川)은 남강의 옛 이름 중의 하나이고 또 진주의 옛 이름으로도 통한다. 그는 또한 공민왕(恭愍王) 1년 임진(壬辰:1352)년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벼슬한 년대로 보아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난 고려시대의 문신(文臣)으로 추정되니 촉석루에 걸린 글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의 작품을 보면;

戰場無恙只名區 전장에서도 별 탈 없는 이름난 이 곳

人世虧成百尺樓 인간세상 무너짐과 성함이 백 척의 누각이구나.

納納乾坤遙峀立 사방에 휩싸여 먼 산은 솟아있고

​溶溶今古大江流 옛이나 지금이나 넘실넘실 큰 강은 흘러가네.

船橫官渡隨緣在 나루터 가장자리 배는 가로로 놓여 있고

鷗占烟波得意浮 안개 자욱한 물결위에 갈매기 유유히 날아다니고

景物有餘佳況少 경치가 이렇게 여유로우니 좋은 일인들 어찌 적으랴.

詩情寥落晉康州 시의 정감이야 진주만한 곳 또 어디 있겠는가.

상기 시는 임란 후에 작가 강대수가 촉석루를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기록한 내용이다. 진주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무후무한 혹독한 난리를 겪어 전 세상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왜적들이 놀던 이 촉석루만은 무사한 것을 보고 그나마 다행히 촉석루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음으로 기뻐서 읊은 시로 보아야 한다.

촉석루만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산들도 진주를 껴안은 듯 솟아 있고 남강 물도 예와 다름없이 흐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진주에 좋은 일들이 어찌 적겠는가 하고 의문사를 써서 앞으로는 좋은 일들이 많을 것임을 암시하여 희망을 주는 시이다.

그리고 경치야 말로 진주처럼 아름다운 곳이 드물 것이라고 진주시민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내용이다.

상기 시를 지은 강대수(姜大遂)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진주이고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 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로 사간 익문(翼文)의 아들이다. 1614년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간언하다가 유배되었는데, 그는 정온을 구하는 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반목하던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난 뒤 사헌부정언·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주부를 지냈다. 1631년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고, 이어 수찬·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고,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관도에 오르지 않았다. 강대수는 생시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 유학자들을 위하여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저서로는 「한사집」 7권 3책이 있고,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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