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제일의 풍광’ 수많은 시인 발길 멈춰
고려·조선조 문걸, 전쟁 후 태평성대 노래

전국 여러 유적지의 누각과 제각 또는 사찰 등의 기둥에 새겨져 있거나 직필, 부착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주련의 글귀가 시문 못지않게 많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진주성 內 북장대 주련.
전국 여러 유적지의 누각과 제각 또는 사찰 등의 기둥에 새겨져 있거나 직필, 부착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주련의 글귀가 시문 못지않게 많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진주성 內 북장대 주련.

 

 

지난 제30호부터 34호까지는 진주성 촉석루 내부에 걸려있는 여러 편의 유명 시문(時文)을 그들 작가의 사상과 행적 그리고 그 역사성과 문학성 중심으로 읽고 해설했다.

이제 본 35호에서는 전국 여러 유적지의 누각과 제각(祭閣) 또는 사찰 등의 기둥에 새겨져 있거나 직필, 부착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주련(柱聯)의 글귀가 시문 못지않게 많이 기록되어있다.

그리하여 본 호에서는 그런 주련의 의미와 중요성은 물론 문학성을 고찰하면서, 특히 우리지역 진주성 내에 있는 유적건축물에 부착된 몇 편의 주련에 대해서 그리고 그 건축물의 설립경위와 역사, 동시에 그 주련의 작가와 내용에 대해 함께 기술하기로 한다.

원래 선대인들이 주련을 제작·설치했던 목적은 첫째, 건축구조물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기복덕(生氣福德)을 소원하고,

둘째, 후손들에게 고지(誥知: 훈계의 말씀)를 전함으로써 후손들의 인격양성이나 조상의 은덕을 인지시키며, 셋째는 그 건축물의 주인공의 생전에 업적을 선양하고, 넷째로는 경관이 뛰어난 주변자연에 대해 아름다운 글귀로 화답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주련의 형태로는 서각형(書刻型), 직필형(直筆型) 그리고 다른 목판에 우선 직필한 후 그것을 집 기둥에 붙이는 부착형(附着型)으로 되어있다.

우선, 부착형 주련인 진주성 촉석루(矗石樓) 주련을 읽기로 한다. 촉석루 주련의 글귀를 읽기 전에 촉석루의 설립과정과 그 역사에 대해서 살펴본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남강가 벼랑 위에 우뚝 솟아 남강과 벼랑이 어우러져 영남 제일의 풍광을 나타내고 있어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고려 고종 28年(1241)에 김지대(金之岱)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촉석루는 전쟁이 있을 때는 진주성의 지휘본부로 쓰여 졌고 평상시에는 누각으로 향시(鄕試)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활용되었다. 6.25동란으로 불타기 전의 촉석루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60년도에 재건되고 나서 도문화재 자료가 되었다.

형태는 팔작와가 다락루의 형태로 전통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1960년대 당시의 촉석루 재건 사업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로 대단한 사업이었다.

그리고 촉석루의 문화재 지정번호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이며, 소재지는 진주시 남강로 626(본성동) 진주성내 이기도하다.

晉陽城外水東流 진양성 밖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叢竹芳蘭綠暎洲 총죽과 향기로운 난 푸르게 비치네.

天地報君三壯士 이곳에 임금님 은혜에 보답하는 삼장사 있었기에

江山留客一高樓 나그네 붙잡는 건 이 강산의 한 높은 누각이구나.

歌屏日照潛鮫舞 가병에 해 비치니 잠긴 교룡 춤을 추고,

劍幕霜侵宿鷺愁 검막에 서리치니 자던 백로 시름하네.

南望斗邊無戰氣 남녘에서 북두성 바라보니 전쟁 기운 보이지 않고,

將壇笳鼓伴春遊 장대의 피리소리, 북소리 봄놀이에 어울리는구나.

◆註◆

- 녹영(綠暎): 그냥 물이 푸르다고 할 때는 벽수(碧水)라고 하고, 푸른 나무 그림자가 비친 물빛을 말할 때에 녹수(綠水 )라고 하니 남강물이 푸르기도 하지만 이 시가 강조하는 것은 총죽, 방란이 남강 물에 비치니 물빛이 더 푸르고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려는데 시인의 뜻이 담겨있다. 예를 들면, 두보 시(杜甫 時)에 명원의녹수(名園依綠水) “녹수가 흘러 정원이 더 아름답다.”는 것은 푸른 나무가 물에 비쳐서 물이 더 푸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해석이 빨라진다. 주(洲): 강심이 깊을 때에 강물 가장자리로서 모래가 물 밖으로 드러난 부분과 연결된 얕은 물.

총죽(叢竹)과 방란(芳蘭)은 식물의 명칭인데 글자를 풀어 번역을 하면 아니 됨.

- 검막상침(劍幕霜侵): 임진왜란, 검막은 군 막사(軍 幕舍)이고, 상침(霜侵)은 서리가 내려서 모든 풀들이 시들어 죽듯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칠만 진주시민이 전멸한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검막상침”이라고 하였다.

- 남망(南望): 일본 해적들은 남쪽에서 쳐들어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두변(斗邊): 하늘을 뜻한다. 북두칠성은 하늘에 있기 때문.

상기 주련을 기록한 작가인 신유한(申維翰: 1681~175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문장가이며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이고 경상북도 고령 출신으로 신태시(申泰始)의 아들이다. 1705년(숙종 3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9년 제술관(製述官)으로서 통신사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해유록」을 지었다. 벼슬은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와 사(詞)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해유록」·「청천집」·「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이어 신유한(申維翰) 또 하나의 주련인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의 주련을 살피기로 한다.

登斯遙瞻北斗 이곳에 오르면 저 멀리 북두칠성을 볼 수 있고,

晋陽城地鎖鑰 진양성은 못으로 둘러 쌓여 있네.

天上樓臺鼓角 하늘 높이 솟은 이 누대에서 북치고 나팔 불어,

退而運籌帷幄 적을 물리칠 작전계획 세웠노라.

◆註◆

이 주련은 이 누각을 설명하는 글로서 아주 잘 지은 글이다.

- 북두(北斗): 여기서는 단순이 별만의 뜻이 아니다. 북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임금님이 계시는 서울을 바라본다는 뜻이 은연중(隱然中)에 담겨 있다.

상기 주련이 기록된 영남포정사 문루의 설립경위와 역사는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10년 (1618)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망미루(望美樓)의 전신이다. 고종(高宗) 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 (晋州觀察府), 건양원년(1896)에는 경상남도 관찰사(觀察使) 청사(廳舍)의 정문으로 영남 포정사라 하였으며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망미루의 현판은 수원유수(水原留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를 지낸 서영보(徐榮輔)의 글씨이다.

문루의 오른쪽에는 하마비가 서 있는데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碑)‘라 적고 있어 출입시에는 수령이하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영남포정사문루의 문화재 지정 번호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이며, 소재지는 진주시 남강로 626(본성동) 진주성 내이다.

다음호 [36호]에서는 진주성 내의 또 다른 주련인 북장대 주련과 봉남서원의 주련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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